[에세이 산책] 버림받은 양심

입력 2010-11-24 11:07:54

누군가가 내 차 범퍼를 긁고 갔다. 흠집은 제법 넓고 깊었다. 그냥 가기엔 뒤가 많이 켕겼을 것 같다. 출고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차라 흠집은 더 크게 느껴졌다. 볼 때마다 속이 상했다. 이 정도면 전화번호를 남겨야 되는 것 아닌가.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자동차는 소모품이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화는 가라앉았다. 화가 가라앉자 마음도 정리가 되었다. 그런데 잊고 싶은 마음과 달리 흠집에서 그가 버린 양심이 계속 발견되었다. 양심은 어디로 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 붙어 있었다.

"당신은 양심을 버리겠습니까?"

공원에 누군가가 작은 푯말을 꽂아 두었다. 내 발이 그 앞에서 멈춰 섰다.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뜻이겠지. 공원 내에 설치된 기구들을 아껴서 사용하자는 뜻도 포함되어 있을 거야. 나는 푯말 옆에 앉는다. 곁눈질하지 않는데도 푯말에 계속 신경이 쓰인다.

"당신도 양심을 버린 적이 있나요?" 푯말이 물었다. 나는 "아니요"라고 답하지 못한다. 내게도 버린 양심들이 많다. 내 책인 줄 착각해서 밑줄을 그어버린 도서관 책과 한밤중 인적이 드문 도로에서 은근슬쩍 무시한 신호등에서도 발견되었다.

'신호는 지켜야 돼.'라는 마음과 '뭐 어때 밤도 깊었고 지나다니는 행인도 없는데'''.'라는 두 마음. 충돌은 간혹 일어났다. 이럴 때 마음은 중재 역할을 하기 힘들어 한다. '안 돼.'와 '그럴까.'의 사이. 선과 악이라고 하기보다는 양심과 비양심의 싸움이다.

힌두교 신자들은 양심을 '우리 내부에 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신'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언제나 신의 감시를 받고 있는 것 같다. 감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선의의 거짓말을 할 때조차도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목소리가 떨린다.

나는 양심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내가 무슨 일을 할 때, 어떤 행위를 하고자 할 때면 내 속에 우뚝 서서 내 마음을 관찰한다. 환하게 밝혀진 그것 때문에 나는 마음먹었던 일을 포기할 때도 있다. 너무 환해서 모든 행동이 들킬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차를 긁고 간 사람은 마음이 더 무거울 것이다. 버리고 간 양심 때문에 다시 가벼워지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잔디 위를 펄렁펄렁 날아다니는 또 하나의 버려진 양심을 보고 있다.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어야겠다. 넣으면서 내가 버린 양심 또한 펄럭대며 날아다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임수진(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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