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랑] 간경변증 앓는 이옥자 씨

입력 2010-11-24 09:13:40

복수 차 부푼 배…스티로폼 덧댄 냉골에 누워…

평생 힘든 삶을 이어 오다 노년에 큰 병에 걸린 이옥자 씨는 의지할 식구 하나 없이 쓸쓸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평생 힘든 삶을 이어 오다 노년에 큰 병에 걸린 이옥자 씨는 의지할 식구 하나 없이 쓸쓸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활짝 피어라, 내 가슴에 응어리진 한(恨)을 안고 활짝 피어라."

지난해 봄 이옥자(가명·59·여·경북 칠곡군 동명면 송산리) 씨는 대문 어귀에서 재래식 화장실로 이어지는 마당 귀퉁이마다 국화꽃 씨앗을 뿌렸다.

22일 오후 1시에 찾은 이 씨의 집 마당은 샛노란 가을 국화가 퍼트린 향기가 가득했다. 차가운 안방 공기와 대조적이었다. 간경변증을 앓고 있는 이 씨는 차가운 바닥에 임신부처럼 잔뜩 부푼 배를 안고 누워 있었다. 의지할 식구 하나 없이 쓸쓸한 노후를 맞은 이 씨가 꽃에 정을 붙이는 이유였다.

◆모진 운명의 쳇바퀴

나는 어머니를 닮기 싫었다. 남편 없이 억척스럽게 두 딸을 키우는 우리 어머니가 참 가여웠지만 그래도 그 삶을 답습하기 싫었다. 아버지는 내가 젖을 떼기도 전에 세상을 떴다. 나보다 세 살 많은 언니와 어머니, 우리 세 식구는 경북 영천에서 경산, 대구를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줄곧 혼자였다. 영천에서 초등학교에 잠깐 다녔지만 어머니의 친정인 경산으로 옮겨오면서 학교 문턱은 더 이상 밟지 못했다. 외할머니는 손녀가 공부에 뜻을 둘까봐 몇 권 되지 않던 책을 부엌 아궁이에 태워 버렸다. 바람에 휘날리는 재와 함께 학교는 내 인생에서 멀어졌다.

1960년대 후반부터 나는 대구 섬유공장의 '공순이'가 됐다. 밤낮으로 미싱을 돌렸던 그때를 떠올리면 기계 소음으로 가득했던 공장의 삭막함만 떠오른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너보다 9살 많은 남편감을 골랐다"고 했다. "이제 공장 그만 다니고 시집가라"는 어머니의 말이 무서웠다. 내 나이 열아홉,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이였다. 결혼 3일 전에 남편이 될 남자를 만났다. 눈이 온 세상을 뒤덮었던 그날, 술이 떡이 된 남자는 우리집 앞 골목에 쓰러져 잠을 잤다. 이 남자와 평생 함께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무너졌다. 그날 밤 시집을 안 가려고 맨발로 도망치다가 눈 쌓인 골목에서 미끄러져 입술을 세 바늘 꿰맸다. 그날 나는 더 멀리 도망쳤어야 했다.

◆무너진 삶, 무너진 몸

내 삶은 조금씩 어머니를 닮아갔다. 대구 양조장에서 일했던 전 남편은 집에 오는 날보다 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남편은 술을 사랑했고 여자를 좋아했다. 새벽녘에 들리는 그의 휘파람 소리는 술냄새만큼이나 싫었다. 그래도 우리 사이에 아들과 딸이 하나씩 태어났다. 그 남자는 당시 한 달에 3천원이었던 월세를 준 적도 없었다.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부지런히 식당일을 했고 당시에 '파출부'라 불렸던 직업도 가졌었다. 아이들 때문에 죽도록 미운 사람을 떠나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은 항상 가슴에 묻어두고 살았다. '그래. 내 자식들은 잘 키우자. 내 딸은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 나를 살게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몸이 아파도 꾹 참았다. 남의 집 일을 하면서 몸이 아프다며 매번 쉬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결국 탈이 났다. 청소를 하다가 배를 잡고 쓰러졌다. 간경변증 진단을 받고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어도 남편은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다. 당시 고3이었던 딸은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때문에 살지 말고, 제발 이혼해." 내가 퇴원하던 날 남편은 밥상을 엎었다. "앓는 소리 그만하고 이제 그만 나가라"고. 1994년 그해 겨울, 남편과 나는 남이 됐다.

◆가슴이 너무 시리다

나는 아이들 곁을 영원히 떠났다. 그렇게 둥지를 튼 곳이 칠곡군이었다. 이혼 뒤 두 남매는 계속 연락했지만 "이제 엄마를 찾지 말라"며 매몰차게 아이들을 밀어냈다. 아픈 몸으로 자식에게 의지하고 살기엔 서로의 삶이 너무나도 팍팍했다. 두 아이가 차례로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외면했다. 병에 찌들어 약해진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병은 갈수록 악화됐다. 술은 입에도 대지 못했던 내가 간이 아픈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얼마 전 대학병원에 입원했을 때 한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뽕짝이라도 들어요. 아주머니는 스트레스 안 푸세요?" 그제야 알았다. 내 가슴을 답답하게 누르던 그 무엇이 모두 병이 됐구나, 이 모든 것이 마음의 병이구나. 내 마음속 어두운 방을 자물쇠로 꼭꼭 잠가두고 단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슬픔을 털어놓기에 현실은 더 고단했다. 식당일을 하며 모아둔 돈과 면사무소에서 빌린 돈으로 1천만원짜리 작은 전셋집을 얻었지만 입원비와 약값을 대느라 전세금을 거의 다 받아썼다. 정부가 주는 30만원 남짓한 보조금은 비급여 약값을 대기에도 벅차다.

모진 아픔은 끊임없이 찾아왔다. 얼마 전 내 딸이 깡패 같은 남편과 이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손녀를 데리고 대구 어딘가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산다는 이야기는 내 가슴을 다시 후벼팠다. 박복한 어미의 운명을 내 딸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나는 정신을 놓았다. 택시비가 없어 버스를 타고 찾아간 병원에서 '간성혼수' 상태에서 어떻게 혼자 왔느냐며 나를 가여워했다.

너무 춥다. 찬 바람이 스며드는 방을 스티로폼으로 덧대고 두꺼운 점퍼와 목도리로 온몸을 꽁꽁 싸매도 찬 기운이 가시지 않는다. 마당에 있는 국화꽃을 꺾어 텔레비전 위에 꽂아뒀지만 꽃의 온기조차 느낄 수 없다. 겨울이 달려오고 있어서가 아니다. 내 가슴이 시린 탓이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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