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근대미술의 향기] 손일봉 '풍경'

입력 2010-11-02 08:18:20

사실 묘사한 울림깊은 전원의 빛

▲손일봉, 풍경, 캔버스 유채, 48.5x63cm, 개인 소장
▲손일봉, 풍경, 캔버스 유채, 48.5x63cm, 개인 소장

손일봉의 울림 깊은 사실주의 풍경

건너 산과 낮은 구릉을 등지고 물가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외딴 마을이 보기에 정겹다. 옹기종기 모인 초가집들은 정적에 감싸인 채 햇살에 드러나는 모양이 영속의 흐름 속에서 끊어 낸 한순간의 장면처럼 영원히 지속될 꿈 속 경치 같다. 차분히 가라앉은 물빛과 수면의 미동은 고요를 더하는데 건너편 아낙의 빨래 방망이와 오리들이 일으킨 작은 파동만이 정적을 깨우는 유일한 움직임으로 지각될 뿐이다.

풍경 속 자연의 시간은 언제쯤일까. 산자락에 진 그늘이나 지붕과 흙 담들에 비낀 햇빛의 각도로 볼 때 이른 아침나절 같기도 하고 오후의 사양이 마지막 열기를 불태울 무렵 같기도 하다. 계절도 언덕 위의 엷은 녹색빛이 이른 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가을처럼도 생각된다. 그림에서 실제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원래 쉽지 않다. 또 그림은 그런 사실적 정보보다는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개성적인 시각이 조직되고 색채나 붓질에 담긴 감성적 요인들을 전달하는 매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미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지금 관객의 시각으로는 그 판단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이런 풍경화는 재현에 충실한 자연주의 작품으로 분류되겠지만 눈앞에 나타난 모습을 단지 묘사한 것만은 아니다. 아마도 작가는 직접 자연을 대하여 대상의 진실을 그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기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 보이는 빛 속에서, 그뿐만 아니라 보는 이의 정서에 의해서도 있는 그대로의 한결같은 상이 포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주관과 감정에 좌우되는 즉흥적이고 임의적인 풍경이 아니라 대상의 관조에 철저하고 견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을 얻으려고 추구했음을 느낀다.

산란하는 빛의 효과를 주목하여 항상 가변적일 수밖에 없는 인상파의 덧없는 풍경화에 불만을 품고 견고하고 영속적인 상을 얻으려고 노력했던 세잔의 시각과 끈기 있는 태도를 모범으로 삼았던 이 작가의 조형이념도 사물의 진실을 찾는데 진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실주의 유화가 조형적 구축의 깊이와 울림이 있고 화면에서 대상을 천착하는 신념이 돋보인다.

제목이 따로 없는 이 그림과 유사한, '추억'으로 제목이 붙여진 나중에 그려진 한 점이 더 있는데 디테일이 간결하게 처리되어 있고 붓질의 스타일이 넓고 부드러운 사용으로 바뀌어 있다. 사실적인 묘사가 관조적인 시각에 의해 다소 평면적으로 단순화되어 노경에 이른 화가의 원숙함을 좀 더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1950, 60년대의 것으로 보인다.

김영동(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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