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작가 위한 첫 개인미술관, '예술의 섬'회장이 직접 설득
때로는 한 사람의 화가가 한 도시의 이미지를 바꿔놓는다. 버려진 땅, 나오시마를 '디자인과 예술의 섬'으로 탈바꿈시킨 일본 베네세 그룹의 후쿠다케 소이치로 회장은 1992년 베네세 하우스 미술관, 아트하우스 프로젝트, 지추 미술관 다음으로 올해 6월 이우환 미술관을 개관했다. 이는 나오시마의 세 번째 미술관이자 한 작가를 위한 첫 번째 미술관이다.
일본과 유럽을 오가며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작가 이우환은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유일한 한국 생존 작가', '한국 생존 작가 중 가장 작품 값이 비싼 작가'로 통한다. 일본 모노하의 대가로, 내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다. 한국 작가로는 백남준 이후 두 번째다.
이우환 미술관이 6월 일본의 작은 섬 나오시마에서 문을 열었다. 이우환 미술관은 고향인 한국은 물론 주요 활동 무대인 유럽에도 없다. 이는 나오시마 섬 전체를 '미술과 건축'을 주제로 리모델링한 후쿠다케 회장의 정성에서 비롯됐다. 후쿠다케 회장은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으로 열린 이우환 개인전을 보고 미술관을 건립할 것을 제안했다. 후쿠다케 회장의 설득과 그의 의지를 본 이우환은 이를 허락했다. 나오시마의 다른 건축과 마찬가지로 평소 친분이 두텁던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를 맡아 작품과 건축물이 일체가 되는 미술관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이우환은 일본의 모노하 운동의 창시자로, 모노하를 세계적인 사조의 반열로 올려놓았다. 모노하란 나무, 돌, 철판 등 가공하지 않은 소재를 있는 그대로 놓아둠으로써 사물과 공간, 위치, 관계에 대한 각각의 고유성을 발견하고 이를 공명시키는 것이다.
이우환은 사실 대구와도 인연이 깊은 작가다. 1970년대 대구에서 현대 미술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때 이우환은 대구를 자주 오가며 작가들과 정신적 교류를 나눴다. 지금은 사라진 시공갤러리 등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그의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 작가들이 대구에 많았기 때문이다.
이우환 미술관을 향하는 길은 안도 다다오의 철저한 계획 하에 설계되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노출 콘크리트 벽과 18m 가량의 콘크리트 기둥이 전부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그의 작품과 오롯이 대면할 수 있다.
이우환 미술관은 '만남의 방', '침묵의 방', '그림자 방', '명상의 방'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안과 밖을 경계짓는 안도의 노출 콘크리트 벽을 지나면 '조응의 공간'이 가장 먼저 나타난다. 삼각형으로 이뤄진 공간에 커다란 돌 한 개와 철판이 마주 보고 있다. 바람이 불고 햇빛이 내리쬐는 자연 속에서 그 둘은 묵묵히 서로를 바라본다. 철판 한쪽 끝이 살짝 들어 올려있다. 마치 돌과의 대답에 응답하는 듯하다. 관람객들은 중요한 작품인 만큼 철판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걷는다. 이우환은 대량 생산된 '만들어진 것'과 자연 속의 '만들지 않은 것'을 함께 만나게 한다. 이 둘을 마주보게 함으로써 보는 이에게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두 번째 전시관은 '만남의 방'. '선으로부터'(1974), '점으로부터(1976)' 등 그의 시대별 대표 평면회화 7점과 조각 한 점이 전시돼 있다. 바닥에는 철판 위에 커다란 돌이 얹혀 있다. 그 철판 위에 균열이 보인다. 그의 2009년작 '대화'다. 머리 위에는 하늘이 비치는 천창이 뚫려 있다. 빛으로 대표되는 자연을 인공적 공간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안도 다다오의 작품이다. 리안갤러리 안혜령 대표는 "천창을 뚫고 빛을 품게 한 부분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안도 다다오에 관한 책 '주택에 대한 사고'를 번역한 김동영 대구가톨릭대 건축학부 교수는 "인공 공간에 들어가서도 자연의 모습과 교감, 소통할 수 있게 한 시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마지막 '명상의 방'에 이르면 관람객 수가 15명으로 제한된다. 미술관 직원은 전시장 안에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한다고 말했다. 침묵 속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 세 개의 벽면에 이우환의 작품 '대화'(2010)가 그려져 있다. 흰 벽면에 회색 빛을 띤 굵은 점 하나가 그려진 세 벽면의 작품을 두고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멀리 떨어져 벽면을 응시하기도 하고 가까이에서 색감의 변화에 집중하기도 했다.
1만여 ㎡(3천여 평)의 부지에 조성된 이우환 미술관의 야외 풍경도 작품의 하나다. 미술관을 빠져나온 사람들은 미술관 밖 바다가 보이는 탁 트인 잔디밭에 앉아 명상에 잠기곤 한다. 안도는 세토해가 그대로 보이도록 배려했고 미술관 주변에는 돌 하나, 나무 한 그루도 허투루 놓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철판과 돌이 놓인 자연 속에서 가족, 연인과 함께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이우환 미술관을 보기 위해 나오시마를 찾은 관광객들도 눈에 띄었다. 대구에서 이우환 미술관을 찾은 이순자씨는 "평소 이우환 작가를 좋아했는데 먼 이국에서 우리나라 작가를 기념하는 미술관을 만나니 가슴 뿌듯하다"고 말했다.
카나가와현에서 온 대학생 스즈키 사나에(21) 씨와 타나무라 쯔바사(23) 씨는 "이우환의 작품은 단순하면서도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다"면서 "평소 좋아하는 건축가인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베네세 그룹이 나오시마에 이우환 미술관을 개관하자 한국인 관광객이 부쩍 늘어났다. 매년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과 나오시마를 보기 위해 나오시마를 찾는 관광객 수는 30만 명. 여기에 이우환을 보기 위한 한국인 관광객이 더해지는 것이다. 세계적 여행 전문지 콘드 나스트 트래블러는 이 작은 섬을 파리, 베를린, 두바이 등과 함께 '세계 7대 관광지'로 선정하기도 했다.
베네세 그룹이 지난 20여 년간 나오시마 프로젝트에 투자한 금액은 약 6천억원이나 된다고 알려졌다. 후쿠다게 소이치로 회장은 앞으로도 30년을 계속해서 투자하겠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인구 3천300여 명의 나오시마는 매년 30만 명 이상을 불러들이는 관광지가 됐다. 후쿠다게 회장은 자신의 철학을 "경제는 문화의 충실한 하인"이라고 밝혔다. 문화도시를 표방하고 있는 대구가 한번쯤 깊이 되새겨볼만한 철학이다.
일본 나오시마에서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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