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세포 사이로 새어 나오는 쇳소리 "살려주이소"
"살려 주이소."
이규철(가명·51·대구 북구 팔달동) 씨의 목에서는 쇳소리가 난다. 암세포가 목과 코 사이에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비인두암'이라는 병명을 안 지 이제 한 달. 50년을 살아온 이 씨에겐 생소한 병명이다. 이 씨는 목이 아파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병원을 찾았다. 2004년부터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온 그는 웬만한 증세가 있어도 병원에 가질 않았다.
이 씨의 목구멍에 붙은 암세포 사이로 "살려 달라"는 말이 새나왔다.
◆기구한 인생, 믿었던 아들마저
이 씨 옆에서 어머니 권명순(가명·76) 씨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을 찍어내는 손은 약하게 떨렸다. 당뇨와 고혈압 등 만성질환을 앓고 있으면서도 권 씨는 지난달까지 낡은 유모차를 끌며 파지를 주우러 다녔다. 동네 곳곳에 버려진 쓰레기더미 틈에서 돈이 될 만한 폐품을 찾아 유모차에 담았다. 다리가 불편해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버겁지만 권 씨는 굽은 허리가 더 굽어지도록 하루에도 수십 번씩 몸을 굽혔다.
기초노령연금으로 매달 8만원씩을 받고 있지만 정부 보조금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하루 종일 동네를 돌며 주운 파지는 2천원 남짓. 그러나 이번 달부터는 파지를 줍지 못한다. 아들을 간병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어서다.
권 씨의 인생은 순탄치 못했다. 25년 전 위암에 걸린 남편이 세상을 먼저 떠난 뒤부터 더욱 그랬다. 권 씨는 의지할 곳을 찾다 경북 예천에서 대구에 있는 막내아들 집으로 옮겨왔다. 하지만 그 집에서 오래 신세를 질 형편이 못됐다. 사업을 하던 막내아들에게 위기가 찾아왔기 때문. 권 씨에겐 4형제가 있지만 경제적으로 기댈 수 있는 자식은 없었다. 장남은 집안 식구들과 크게 싸운 뒤 연락을 끊었고, 우울증을 앓고 있는 셋째는 직장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둘째 규철 씨가 살고 있는 단칸방이었다. 그러나 규철 씨마저 지난달 암선고를 받았다.
세월이 갈수록 눈물을 흘리는 날도 늘었다. 제몸을 가누기도 힘든 노모는 간이침대에서 생활하며 비인두암에 걸린 둘째아들 병수발을 들고 있다.
◆규철 씨, 희망을 잃다
규철 씨는 굽은 허리로 파지를 줍는 노모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자식 덕을 봐도 모자랄 판에 몇 천원 더 벌겠다고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자 자신이 더 미워졌다. 2004년부터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규철 씨는 동네 청소를 하는 공공근로와 매달 40만원 남짓한 수급비로 생계를 유지했다. 어머니와 한 동네에서 각각 쪽방을 얻어 살고 있는 그에게도 희망은 있었다. 13년 전 이혼한 아내 사이에서 얻은 딸 혜연(가명·22) 씨가 규철 씨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언젠가는 탈(脫)수급을 해 쪽방을 벗어나고, 딸이 시집갈 때 당당한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작은 욕심이 있었다.
이 욕심마저도 그에게 과분한 것이었을까. 지난달 추석 무렵 규철 씨는 목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참기 힘든 통증을 호소했다. 어쩔 수 없이 찾은 병원에서 난생 처음 듣는 병인 비인두암 진단을 받았다. 코 뒷부분과 목을 연결하는 비인두에 암이 생긴 것이다. 병을 진단받은 그 순간부터 몸은 격하게 반응했다. 이달 6일 대구의 한 대학병원에 입원한 규철 씨는 목소리를 내기 힘들 정도로 병이 급속히 악화됐고 암세포가 눈으로 전이돼 왼쪽 눈 시력도 잃었다. 그렇게 그가 붙잡았던 희망도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200만원이 전 재산
규철 씨는 지난 5월부터 좁은 방을 어머니와 함께 나눠 쓰기로 했다. 건넛방에 살았던 어머니와 규철 씨가 월세 8만원을 아껴볼 요량으로 작은 방에 두 식구의 몸을 구겨넣었다. 유난히 더웠던 올해 여름, 어머니와 규철 씨는 땀으로 끈적거리는 등을 서로 마주하고 지냈다. 8만원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26일 오후 2시 병원에서 만난 어머니 권 씨는 200만원이 들어 있는 통장을 한 손에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매달 나오는 노령연금 8만원을 아끼고 아껴 어렵게 마련한 돈 200만원, 이는 이들 가족이 가진 전부였다. 규철 씨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전 재산을 내놓았다. 200만원이 누군가에게는 생명이 걸린 전부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적은 돈일 수 있다. 취재가 끝난 병실의 TV 뉴스에서는 한 재벌그룹이 정·관계 인사들에게 법인카드를 주고 수십억원대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대법원장 탄핵 절차 돌입"…민주 초선들 "사법 쿠데타"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