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는 예정 시간보다 30분가량 늦게 시작됐다. 밀려드는 환자 때문이었다. 대구파티마병원 마취통증의학과 이상곤(51) 과장은 연방 미안하다면서도 환자를 대할 때는 서두름이 없었다. 한 여성 환자가 침대에 옆으로 웅크린 채 누워 있었고 등쪽으로 무언가를 심어넣는 시술이 진행 중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말기 간암 환자를 위한 지속적 신경차단술이었다. 시술 중에도 그는 끊임없이 환자에게 통증 여부를 묻고 격려하고 위로해주었다. 그런 와중에도 옆에 선 전임의 2명에게 시술시 주의할 점을 설명했다. 10여 분에 걸친 시술이 끝나자 곧바로 대상포진, 돌발성 난청 때문에 찾아온 환자들에게 통증을 가라앉히는 주사를 놔 주었다.
◆통증을 다스리는 의사
대구파티마병원은 1986년 지역에서 처음으로 통증치료실을 열었다. 2008년 대한통증의학회 주관 연수시설병원 실태조사에서 이곳 통증치료실이 영남권 최우수 성적을 받아 통증 전임의 연수시설병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지난해 감염내과, 피부과와 함께 대상포진 클리닉도 개설했다. "갈수록 통증클리닉을 찾는 환자들이 늘면서 의료계의 관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마취는 신경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고, 통증 조절은 마취제 용량을 약하게 해서 부분 차단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경을 다스린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만성 통증을 다스리는 방법으로는 신경차단술이 대표적이다. 통증을 야기하는 신경 가까이에 약물을 투여하는 것. 국소 마취를 통해 일시적으로 신경을 잠재우기도 하고, 극심한 통증의 경우 아예 신경파괴제를 써서 고통을 없애기도 한다.
바람만 불어도, 물에 손만 담가도 살을 에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는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 환자들도 이곳을 찾는다. 한 달에 3, 4명은 꼭 찾아온다. 유병률이 높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환자가 찾는 셈이다. 대상포진 환자들도 많이 온다. 수두 바이러스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신경절에 잠복해 있다가 면역기능이 떨어지면 다시 활성화하는 것이 대상포진이다.
신경을 따라 바이러스가 내려오면서 발진, 물집, 화농이 생기고 급기야 많은 흉터를 남긴다. 더 큰 문제는 후유증인 신경통이다. 갑작스레 통증이 워낙 심하다 보니 국소 마취를 통해 통증을 다스리는 동시에 강력한 소염작용을 하는 스테로이드도 함께 써야 한다. 아울러 인간이 느끼는 통증 중에 가장 극심하다고 알려진 '3차 신경통' 환자들도 이곳을 찾는다. 환자마다 처방과 시술이 조금씩 달라진다.
◆통증클리닉은 진통과 치료를 겸해
통증 외에 돌발성 난청, 다한증, 손발 냉증 환자들도 치료한다. 이런 질환들은 혈관이나 땀을 조절하는 자율신경에 문제가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자율신경도 통증에 관여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예민하면 아픈 이유가 여기에 있죠. 열이나 땀이 나고, 눈물이 흐르는 자율신경이 너무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신경차단술이 쓰인다.
발바닥에 땀이 많은 경우, 허리에 있는 신경절에 '요부교감신경 차단술'을 쓴다. 또 돌발성 난청의 여러 원인 중 자율신경에 문제가 있는 경우, '성상신경절 차단술'을 시술하면 귀로 가는 혈액 순환이 좋아지면서 난청이 사라지기도 한다.
25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데다 통증 조절에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면서 이곳 클리닉에는 매일 40~60명씩 환자가 찾아온다. 그런데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통증 클리닉은 치료가 목적입니까, 아니면 단지 증상을 완화하는 곳입니까? 원인 치료를 하지 않고 그저 통증만 없앤다면 결국 병을 키우는 셈이 아닙니까?" 이 과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여기서는 맹장염, 복막염으로 찾아오는 급성 통증이 아니라 만성 통증을 주로 다룹니다. 급성 통증은 수술하면 금세 사라집니다. 하지만 만성은 100% 완치보다 완화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진통과 치료를 겸하는 겁니다. 고통을 없애서 당장 일상생활을 보다 편안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거죠."
가령 디스크, 염좌, 협착증 때문에 생기는 요통이나 오십견 등은 정형외과에서도 상당 부분 수술없이 물리치료만으로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워낙 아파서 거동도 힘든데 물리치료는 엄두도 못 낸다, 이런 경우 통증부터 없애는 것이 급선무.
◆통증은 증상이 아닌 질환
"드디어 통증 치료에도 초음파가 사용됩니다. 최근 근골격계 신경통증 치료에 쓰이는 초음파를 새로 도입했습니다. 지역에선 처음입니다. 초음파로 신경이 세밀하게 다 보이기 때문에 다른 신경 손상이 없이 정밀하게 약물을 주입할 수 있습니다."
보다 많은 시간을 환자에게 쏟으려고 애쓰지만 안타까운 경험도 많다. "통증치료는 한 번에 끝나지 않습니다. 속전속결을 기대했다가 당장 효과가 없어서 병원을 돌아다니는 환자를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금세 효과가 없다고 돈을 돌려달라는 환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통증치료를 못하는 환자가 가장 안타깝죠. 조금만 더 치료하면 되는데…."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호스피스 병동 환자들에게는 지속적 신경차단술이나 신경파괴제를 이용해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말기 위암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대량의 마약진통제를 사용했지만 효과가 별로 없어서 늘 힘들어했죠. 그런데 신경차단술을 한 뒤 통증없이 웃으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외출을 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대상포진을 앓는 초등학생 환자도 있었다. 부모는 불안에 떨었고, 아이는 공포에 질렸다. 초기에 성상신경차단술을 시술해 말끔히 통증을 가라앉혔다.
이 과장은 요즘 치료뿐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많은 강연을 한다. 통증학회 연수교육뿐 아니라 정형외과나 신경외과 개업의들에게도 강연을 하고 있다. "경제 여건이 나아지고 평균 수명이 80세 중반까지 오르면서 노인인구가 급증했습니다. 갈수록 '삶의 질'이 중요해집니다. 최근 행복전도사인 최윤희 씨가 700가지 통증을 견딜 수 없어 죽음을 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통증에 대한 개념이 바뀌고 있다. "과거에 통증은 질환을 알려주는 하나의 증상에 불과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통증 자체를 질병으로 여깁니다.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질환 중에 원인을 모르는 질환이 태반입니다. 원인을 밝히려는 노력과 함께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합니다. 통증은 다스릴 수 있는 것이고, 반드시 치료해야 합니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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