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으로 싸늘한 기운이 옷섶을 여미게 하고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드높다. 들판 가득 황금색 파도가 일렁이고 나무 위의 열매들은 단물이 비치도록 탱탱하게 몸을 부풀렸다. 온 세상이 은혜로움으로 가득 찬 느낌이다.
끝이 보이지 않던 무더위와 긴긴 불면의 밤, 이글거리던 태양, 그것들의 뒷모습은 강렬했던 만큼 더욱 애잔하다. 내게 허여된 시간의 일부가 또 흘러가 버렸다. 가버린 여름, 휴가철, 젊음, 아쉬움의 정체는 그것만이 아니다. 꽉 찬 들판은 머지않은 날의 추수를 예고한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곧 황량한 빈들로 남을 것이다. 땡볕과 비바람을 견디며 다독여 온 잎과 알찬 열매를 다 내주어야 하는 대지는 얼마나 허허로울까. 그러나 차면 비워내야 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요 순환의 이치다.
어느 신부님이 종교도 사랑도 과학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지구가 태양열을 받으면 35%를 함유하고 65%는 밖으로 내보낸다고. 지구가 욕심을 부려 그 열을 1%만 더 붙들고 있어도 생물이 살아갈 환경이 못돼 모든 생명이 멸망할 것이라고 했다. 바로 알맞은 가짐과 나눔의 이치가 숨어있는 이야기다.
누군가의 나눔이 나를 채워주고 나의 나눔이 어딘가의 빈자리에 가서 채워진다는 나눔의 순환, 채움이 과하면 모두를 잃을 수도 있다는 비움의 의미가 가슴에 울림으로 남는다. 인생의 10월을 보내고 있는 나의 발걸음은 무엇을 추수해서 어떻게 나눔을 해야 할 것인가. 지나치게 채우고만 걸어온 것은 아닐까.
나눔이란 물질만 오가는 것이 아니고 물질을 따라 마음이 오가는 '너와 나'의 소통이다. 계층을 아우르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나눔이 이 시대의 화두가 되기 시작한 것은 서양 부자들의 영향력이 크다. 그 사회의 기부 문화를 보면 그들은 체격처럼 마음 보따리도 크다는 생각이 든다. 나눔이란 쓰고 남는 것을 주는 행위가 아니고 내 몫에서 덜어내야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가까스로 손안에 거머쥔 것을 선뜻 내어놓는 일이 쉽기만 하겠는가. 나눔은 바로 사랑이다. 그리고 희생이다.
사랑의 감정과 끝 모르는 욕망은 나의 내면세계에 쌍둥이처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상반된 속성을 가진 그 둘은 내 안에서 끊임없이 다투며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욕망은 걸림돌이 되어 사랑의 길을 막아서기도 한다. 바로 말하면 욕심이고 좋게 표현하면 꿈이랄 수도 있는 욕망, 그것은 이 가을에 내가 걸러내고 정화시켜야 할 숙제의 한 제목이다.
정작 들여다보면 나눌 것이 참으로 많다. 물질이 궁하면 퍼 올려도 샘솟는 따스한 마음이 있고 온화한 미소도 있지 않는가. 내 안에 사랑의 작은 씨앗이라도 남아 있다면 가을 햇살에 단단하게 살을 올려 가슴이 비어 있는 그 누군가와 아낌없이 나누자. 그것이 보은(報恩)이다. 사랑에 베풂이 필요조건이라면 나눔은 충분조건이다.
박헬레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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