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 세워야 할 비석, 묻어야 할 비석

입력 2010-09-27 10:54:35

추석 연휴, 아마도 수천만 명의 성묘객들이 조상의 묘소를 참배했을 것이리라. 조촐한 돌비석 하나뿐인 공원묘지에 국화꽃 한 다발을 갖다 놓은 후손들도 있을 것이고 거창하게 치장된 분묘에서 술잔을 올린 후손도 있었을 것이다.

성묘길 코스모스가 핀 길섶을 지나며 사람들은 왜 무덤 앞에 굳이 비석을 세우고, 그것도 가세(家勢)가 큰 집안은 육중한 가첨석을 얹거나 농대석에다 귀갑(龜甲)을 받친 비석에 긴 비명(碑銘)을 새기고 싶어할까를 생각해 본다.

왕의 능(陵)조차도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과 세종의 영릉(英陵)까지는 치적과 공덕(功德)의 비명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졌으나 문종 이후론 '임금이 행한 일이나 자취는 국사(國史)에 다 기록되어 있으므로 굳이 사대부와 같이 신도비(神道碑)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주청에 따라 능표만 세우고 비명을 새긴 비는 없앴다. 오히려 세간에서 조상의 치적을 새기고 묘소 주변에는 울타리까지 치는 세칭 호화분묘를 더 많이 보게 된다. 그런 별난 묘소를 보노라면 '본래 그 속(묘지)에 들어간 사람은 어차피 밖으로 못 나올 거고 바깥 사람은 그 속에 들어가고 싶어하지도 않을 건데 울타리는 왜 치느냐'고 꼬집었다는 마크 트웨인의 풍자가 생각난다.

비석은 고인의 삶의 행적이 비명으로 남겨야 할 만큼 빛나고 감동적인 것일 때만 세우는 게 걸맞다. 수많은 비명이나 치적을 기린 기념관 등을 보면 어느 누가 말했듯 '사람들이 비석을 세우는 것은 죽은 자의 체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사람들의 체면을 빛내기 위한 것일 때가 많다'는 말을 되새겨보게 된다.

조조가 자신의 가짜 무덤을 72개나 만들어 스스로의 부끄럽고 악(惡)했던 삶을 숨기고 싶어했던 경우처럼 때로 후세가 만들어준 비석은 오히려 부끄러움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현대사에도 논란이 많았던 역대 대통령들의 삶과 행적을 기리는 기념관, 공원 등은 죽은 자를 위한 뜻이 없진 않겠지만 뒤에 살아있는 자들의 체면을 빛내기 위해 세워진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기념관, 동상, 기념비를 세우는 논란이 있을 때마다 정치적 고려가 개입됐었기 때문이다.

추석 전 누가 필자에게 메일로 다섯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한 장은 김대중 컨벤션센터(총면적 1만 2천 평, 주차시설 1천700대, 공사비 785억 원) 사진이었고 또 한 장은 김영삼 기록전시관 사진, 다른 또 한 장은 음악가 윤이상 기념공원(국비 80억 원) 사진, 그리고 마지막 사진은 짓다 만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건설 현장 사진이었다. 녹슨 리어카가 보이고 기초 골조만 다진 콘크리트 벽 앞에 잡초가 우거진 초라한 장면이었다.

DJ, YS의 공과(功過)와 치적 논란은 덮자. 김일성 주석 사망 5주년 때 '아~수령님, 위대하신 수령님, … 부디 영생불멸하십시오…'라고 썼다는 편지와 그런 행적을 지닌 사람의 이름으로 기념공원을 만드는 게 합당하냐는 논란이 덧붙어 있는 윤이상 씨에 대한 인터넷 자료 또한 덮자.

다만 우리 모두 이런저런 비석들 앞에서 큰절하고 돌아온 지금, 한국 땅에선 미루고, 멈춰지고, 책정된 예산마저 환수당하며 밀쳐졌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비가 한국이 아닌 독일에 먼저 세워진다는 소식만은 뼈저리게 자성해 볼 필요가 있다. 46년 전 독일에 파견 간 광부들, 간호사들과 만나 목 놓아 울었던 그 장소다. 미국에서도 이 땅에선 동상까지 쓰러뜨렸던 이승만 전 대통령을 위해 '이승만 홀'을 만든다고 한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지우는 것은 비바람이 아니라 망각을 잘하는 인간의 마음이다'고 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진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죽은 자의 거짓과 진실을 가리기 전에 너무 쉽게 휩쓸리고 넘어가 버리며 그들의 숨겨진 허상을 망각한 채 안 세워야 할 비석을 세우고 세워야 할 비석은 세우지 않은 것은 아닌지…. 추석을 보내며 비명(碑銘)의 진실과 허구를 생각해 본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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