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일 생겨… 기념일… '건수만 생기면 쏜다'
'쏜다.'
총이나 화살을 쏘는 것이 아니다. 침을 가진 곤충이 쏘는 것도 아니다. 영화제목도 아니다. 바로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한턱낸다'(It's on me, It's up to me)는 의미다. 더치페이(Dutch Pay, 각자 계산)가 익숙지 않은 한국 사회에선 툭하면 여기저기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오늘 내가 쏜다' '이번엔 누가 쏠 차례냐'를 적절하게 잘하는 사람은 회사나 가족, 친구들에게도 처신을 잘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쏜다는 것처럼 기분 좋은 말이 어디 있을까? 계산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기분이 한껏 오를 수밖에 없다. 반대로 본인이 한턱 내야 할 상황에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거나, 너무 싸게 쏘면 욕 얻어먹기 딱 좋다.
쏘는 데도 묵계처럼 문화는 분명히 있다. 예컨대 생일을 맞았거나 결혼하는 사람은 선물이나 축의금을 들고 온 손님들을 환대하며 거하게 쏴야 할 의무가 지워져 있다. 또 좋은 일로 상금을 두둑하게 받거나, 골프에서 홀인원을 했다면 반드시 동료나 동반자, 캐디에게 쏴야 욕을 먹지 않는다.
개인적인 입장에선 불경기임을 명심하면서, 그리고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며 쏘아야 한다. 잘못 쏘아 마이너스 통장에 카드 돌려막기를 할 정도면 절대 안 된다. 너무 잘 쏘는 통에 가정에 심각한 경제적 부담을 지우는 경우도 있다. 대한민국의 독특한 쏘는 문화 속으로 들어가보자.
◆과도하게 쏘는 이들, '달려라 달려'
기분파들은 어쩔 수가 없다. 동료, 친구들과 어울릴 건수를 찾느라 고심한다. 이도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오늘 약속 없는 분들 OOO로 오세요. 제가 술 한잔 사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상금 10만원 받고 점심 한 끼만 쏘아도 될 일을 저녁에 한껏 기분 내다 술값만 상금의 몇 배를 쓰고 홀쭉해진 지갑을 보며 아침에 후회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유통업에 근무하는 정상호(46) 씨는 쏘는 데 달인에 가깝다. 쏘다가 결혼도 늦어진 케이스. 여자친구도 아내도 없는 탓에 늘 직원들과 술자리를 즐겼다. 술값 역시 십중팔구 본인이 책임을 지는 기분파. 최근 그는 한 여자와 선을 보고 난 뒤, 교제를 시작하면서 기분이 좋다고 또 쏘았다. 모범사원이 되어 상금을 받은 날에는 더욱 기분이 좋아져 같은 부서 직원 7명과 밤새도록 술을 마셨는데 술값이 상금의 6배나 됐다. 정 씨는 시원하게 쏜 지 불과 1개월도 되지 않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본인의 잘못으로 배달사고가 나 시말서까지 쓰며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쏘는 범위를 무한정 확장하는 이들도 있다. 마치 나이트클럽에서 골든벨을 울리며 전체 술값을 쏘는 것처럼. 금전적인 부담이 엄청나도 쏘는 기분은 최상이다. 자녀가 하나뿐인 가정이 적잖아 쏘는 문화를 확산시키기도 한다. 한 초등학생 엄마는 "그렇게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아들 생일날 같은 반 학생들에게 햄버거와 콜라, 치킨을 배달시켰다"며 "몇십만원을 썼지만 다른 집 아이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분수에 맞게 쏩시다', 십시일반도 좋아
남편의 쏘는 습관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맞벌이 아내는 대한민국의 쏘는 문화에 대해 일침을 놨다. "뭐 그리 쏠 일이 많고, 상대방이 쏘기를 기대합니까? 각자 조금씩 부담하면 서로 좋고, 그게 공평한 것 아닙니까? 미안한 얘기지만 한국 사회에도 분수에 맞게 쏘고, 가능하면 N분의 1로 계산하는 습관이 정착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녀는 지난 5월 남편이 직장에서 해외 연수자로 뽑혀 외국에 나가게 됐는데, 일정이 맞지 않아 한턱 내지도 못하고 떠난 데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는 동료들이 많아 결국 회식비를 사무실에 가져다 줬다고 한다. 그는 "조그만 일만 생기면 그 일을 건수로 생각해 술 한잔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회사원들이 많다"며 "서로 어렵다는 생각으로 한턱내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불경기에는 특히 쏘는 것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주말 골퍼인 회사원 이순상(45) 씨는 최근 골프가 잘 되면서 오히려 홀인원에 대한 부담이 생겼다. 홀인원을 하게 되면 캐디에게 떡값으로 20만~ 30만원을 줘야 할 뿐 아니라 동반자들의 무료 라운딩, 저녁 회식 등에 최소 200만원의 비용이 들기 때문. 그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업가 친구에게 "혹시라도 홀인원을 하게 되면 캐디에게 줄 돈과 회식비는 내가 쏠 테니, 나머지 비용은 좀 도와 달라"고 미리 얘기해 뒀다.
◆자리 잡아 가는 '더치페이' 문화
잘 쏘는 법은 여러 가지다. 쏴야 할 상황에서 자존심이 조금 구겨져도 "제가 가진 돈이 이것밖에 되지 않으니, 나머지는 조금씩만 도와주십시오"라고 읍소하면 된다. 그리고 정말 형편이 풀리고, 여유가 있을 때 그 범위 안에서 시원하게 쏘면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특별한 일이 아닐 때는 각자가 자신의 몫을 분담하는 더치페이 문화에 익숙해져야 할 때가 됐다.
세계적으로 쏘는 문화는 다 있다. 미국 뉴욕의 화이트칼라족들 사이에서는 식당에서 신용카드를 서로 내밀며 식사값을 계산하려는 실랑이가 끊이지 않아 결국은 복불복 게임처럼 식당 주인에게 한 장의 신용카드를 골라 계산하도록 하는 문화까지 있었다. 하지만 경기가 어려워지자 식사 후 달콤한 디저트 대신 차가운 요금 명세서를 바라보며 계산을 미루는 일이 흔해졌다.
기업들의 식사 문화도 더치페이를 기본 원칙으로 하되 '가진 자'와 '덜 가진 자'를 기준으로 변하고 있다. 밥값을 계산하는 것은 자신의 회사가 더 나은 재무제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과거 '갑'과 '을'의 관계에 따라 식사값을 내던 것과는 달라진 문화다.
우리 나라의 직장 문화 역시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동료나 동기끼리는 더치페이 또는 돌아가면서 쏜다. 또 같은 팀에서 선배가 3, 4번 밥을 사면 후배도 1번쯤은 밥값을 내는 문화가 자연스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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