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순국 100년] 석주 이상룡

입력 2010-09-21 09:24:48

서간도지역 독립운동 지도…임시정부 국무령 올라

1911년 1월 27일, 석주 이상룡은 압록강 앞에 섰다. "칼끝보다도 날카로운 저 삭풍이 내 살을 사정없이 도려내네. 살 도려내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나라가 무너졌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시로 무거운 마음을 담아냈다. 그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나라가 무너지자 안동 선비들이 선택한 길은 자정순국과 만주망명이었다. 이상룡이 선택한 길은 만주 망명이었다. 1908년 국권회복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혁신유림으로 전환했던 그는 일제강점이라는 뼈저린 현실 앞에서 또 다시 고민에 빠졌다. 결론은 "만주는 단군성조의 영토이며, 고구려의 강역이라, 백번 꺾여도 좌절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만주로 옮겨가 독립운동을 펴겠다"는 것이었다.

만주로 망명한 이상룡은 국내에서 계획하던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경학사·부민단·한족회·서로군정서를 이끌며, 서간도지역 독립운동을 지도했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에 올라 민족운동계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유하현 삼원포에서 통화·해룡·반석·화전·길림을 거쳐 서란현 소과전자까지 21년 간의 긴 여정이었다. 그리고 1932년 5월 12일, 지금의 길림성 길림시 서란현 이도향 소과전자촌에서 독립운동가로서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서란현 소수민족지'는 마지막까지 초연했던 석주 이상룡을 기억했다. "소과전자에서 병을 치료할 때도 의연히 학교를 끌고 나가도록 민중을 교화했으며, 청소년들에게 반일애국사상을 선전하면서 반일투쟁을 진행하도록 고무했다."

이상룡을 따르던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만주에서 사라졌다. 추산 권기일과 김동만, 김만수는 일제의 총칼 앞에 무참하게 쓰러졌고, 존경하던 큰 아버지 이상룡을 따라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성장했던 이광민도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숱한 사람들이 이름 없이 사라졌다.

이들의 죽음과 대면할 수 있는 만주의 독립운동 현장은 '역사 앞에 떳떳한 인간의 참 의지'를 생각하게 한다.

강윤정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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