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병합 100년 침략자들의 본향을 찾아] (上)원흉은 누구인가?

입력 2010-08-27 10:35:14

'征韓論' 추종 요시다 제자들, 출세욕 젖어 병합 앞장

요시다 쇼인의 수제자로 조슈번을 막부 타도의 근거지로 만든 다카스기 신사쿠(가운데)와 그의 시종이나 다름없던 청년 시절의 이토 히로부미(오른쪽). 1865년 나가사키에서 찍은 사진.
요시다 쇼인의 수제자로 조슈번을 막부 타도의 근거지로 만든 다카스기 신사쿠(가운데)와 그의 시종이나 다름없던 청년 시절의 이토 히로부미(오른쪽). 1865년 나가사키에서 찍은 사진.
요시다 쇼인이 세운 학당 쇼카손주쿠(松下村塾)는 볼품 없는 자그마한 목조 건물이지만 메이지유신과 \
요시다 쇼인이 세운 학당 쇼카손주쿠(松下村塾)는 볼품 없는 자그마한 목조 건물이지만 메이지유신과 \'정한론\'의 태동지다.
쇼카손주쿠에 걸려있는 13인의 초상. 윗줄 가운데가 요시다 쇼인이고 나머지는 일세를 풍미한 제자들이다.
쇼카손주쿠에 걸려있는 13인의 초상. 윗줄 가운데가 요시다 쇼인이고 나머지는 일세를 풍미한 제자들이다.

1910년 8월 29일. 100년 전 그 날, 한국인들에겐 더할 수 없는 치욕의 날이었지만, 일본에게는 임진왜란 이후 300년 만의 숙원을 해결한 날이었다.

한일병합을 기획하고 실행한 이들은 누구였을까. 정계와 군부에서 병합에 앞장서고 주도했던 이들은 모두 일본 서남단의 한 지역에서 함께 나고 자란 인물들이었다. '조선 병합은 순전히 조슈(현재의 야마구치현) 사람들의 작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등 조슈 출신들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성공시킨 일본의 영웅들이었지만, 한국인들에겐 잊지못할 상처를 남긴 침략자들이다. 그들의 본향(本鄕)을 찾아 침략자들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봤다.

(上) 한일병합의 원흉은 누구인가.

◆그 곳은 요시다 쇼인의 땅

야마구치(山口)현 하기(萩)로 가는 길은 험했다. 현청이 있는 야마구치시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2시간 가까이 좁은 산길을 달렸다. 19세기 말까지 조슈번(長州藩) 영주가 살았고 번의 수도였던 만큼 제법 번화한 도시인줄 알았다.

인구가 5만5천명이라고 하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시골이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관광객마저 없다면 살아있는 도시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다. 높은 건물 하나없이 옛날 그대로의 전통 가옥이 늘어서 있고 차량 1대가 겨우 지나다닐 만한 좁은 도로가 전부였다. 존왕양이(尊王攘夷·일왕을 숭배하고 외세를 물리치자는 사상)운동의 태동지이자 수많은 과격파 사무라이들의 근거지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메이지 시대때 이곳에는 '발에 차이는 것이 정부 대신이나 육군 장성이었다'고 한다.

과격한 양이사상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세운 학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로 가는 길에 60대 남자에게 길을 물으니 그는 "요시다 선생은 우리의 사표(師表)"라며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막상 쇼카손주쿠를 찾으니 다다미방 2칸 크기의 초라한 목조건물이었다. 이 보잘 것 없는 시골 학숙에서 참의(메이지 초기 정부의 최고위직) 2명, 총리대신 2명, 대신 2명이 나왔다니 기분이 좀 묘해진다. 당연히 그들 모두가 한일병합의 선봉장이었고 일본 제국주의의 기초를 닦은 이들이다.

요시다는 1856년 3월부터 막부(幕府)에 의해 처형되기 직전인 1858년 12월까지 2년 10개월간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곳을 거쳐간 제자는 모두 90명. 상당수가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에 따라 도쿠가와 막부와의 싸움에 뛰어들었다가 불꽃처럼 산화했다.

하기학물관 학예사 도사코 신고 씨는 "하기 사람들은 물론이고 많은 일본인들이 근대의 최고 사상가로 요시다 쇼인, 행동하는 사무라이의 상징으로 그의 제자인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를 꼽는다"고 했다.

학숙 바로 뒤편에는 그를 주신(主神)으로 모신 쇼인 신사(神社)가 장엄하게 서 있는데 역대 일왕과 총리들이 다녀간 곳이다.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도 1879년 요시다 쇼인을 주신으로, 제자 다카스기 신사쿠를 배신(陪神)으로 안치해 출발했다. 아직도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정점에는 요시다 쇼인이 있는 것이다. 이곳 하기가 바로 요시다의 정신과 얼이 배어 있는, 일본 군국주의의 본향임을 실감케 한다.

◆무엇을 배웠는가

"몸은 비록 무사시(도쿄 인근 지명)의 들녘에서 썩어지더라도 남겨지는 야마토다마시(大和魂·일본 정신)…." 요시다 쇼인이 나이 서른에 참수되면서 남긴 '유혼록'(留魂錄)은 너무나 유명하다. 사무라이의 기백은 높이 평가받을지 모르겠으나 그 실천법은 옹졸하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조선과 만주, 그리고 중국의 영토를 점령하여 강국(유럽)과의 교역에서 잃은 것은 약자에 대한 착취로 메우는 것이 상책이다." "오키나와를 손에 넣고 조선을 빼앗은 후에 만주를 무찌르고 중국을 제압하며…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유지를 이어받는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소위 '정한론'(征韓論)의 출발점이다. 그가 제자들을 훈육하면서 남긴 말과 글은 그대로 일본 제국주의의 모토가 됐다. 당시 서양의 위협에 충격을 받은 하급 사무라이 한명이 쏟아낸 과격한 사상을 일본 전체가 추종하다가 뒷날 패전에 이르고 국민 전체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이다.

한일병합의 선봉 역할을 한 것은 요시다의 문하이면서 4차례 총리대신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본 육군의 교황'이라고 불리며 2차례 총리대신을 지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였다. 각자 문(文)과 무(武)로써 조선을 위협하고 한일병합을 기획하고 추진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원래 무사 계급이 아니라 비천한 신분 출신이었다. 하기 서쪽에는 무사마을이 고스란히 보존돼있는데 그곳에 살 자격이 없던 그 둘의 집은 외곽에 남아있다.

둘다 요시다의 문하에 들어갊으로써 입신양명의 기회를 잡았고 죽을 때까지 권력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던 공통점이 있다. 제자라고는 하지만 신분때문에 스승 곁에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고 심부름이나 뒤치다꺼리를 했고,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는 과정에서도 조연 역할만 했다.

요시다의 문하에는 다카스기 신사쿠를 비롯해 '4천왕'(四天王)이라고 불리던 4명의 뛰어난 제자가 있었다. 재주가 출중하고 나름의 사상적 토대를 갖고 있던 수제자들은 메이지 유신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모두 살해당하거나 요절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사라진 빈 자리를 출세욕에 불타던 조연들이 대신 차지했다는 점이다. 그 조연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 일본을 이끌어가고 군국주의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것이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불행이었다. 천박한 사무라이 문화의 전형만 남겨놓은 것이다. 일제 강점기시절 그네들이 왜 그렇게 모질고 악랄하게 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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