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 논고동

입력 2010-08-26 14:21:53

가을이 오는 길목의 고향 들녘은 정말 아름답다. 푸르름만이 이 세상에 있는 색깔 중의 색깔이란 듯 온통 녹색 천지를 이루던 여름이 물러설 채비를 서두르기 때문이다. 입추와 처서가 지나면 더위가 한 풀 꺾이면서 온 사방 천지에서 벌어지고 있던 푸른 잔치에도 약간의 이상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원숙의 경지로 들어서는 초입 단계가 바로 이 시기다.

그림에서도 짙은 그린이 묽은 옐로와 그레이가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고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으면 보기에 식상하다. 자연을 캔버스에 옮겨 온 것이 그림이고 그림은 자연을 모방하고 표절한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고향집 주변의 들녘을 굳이 화폭으로 옮겨오지 않더라도 싱그러운 푸른 잎사귀들이 황갈색 기운을 띠면서 서서히 원숙의 계절 가을로 향하는 모습은 장하고 풍성하다.

##여름밤, 쉼 없이 울리던 개구리 합창

고향집 앞 한 집 건너는 논이었고 논 앞 방천둑 밑은 뽕나무밭이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개구리들의 코러스가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에 나오는 '사냥꾼의 합창'처럼 장엄하게 들린다. 한 마리의 선창으로 시작한 무대는 두세 마리가 따라붙고 이윽고 주변에 소리통을 가진 놈들은 모조리 달라붙어 기막힌 화음을 만들어 낸다.

개구리들의 여름 합창은 오케스트라, 조명, 입장객 유무와는 아무 상관없이 악장 사이사이에서도 잠시도 쉬지 않는 아타카(attacca, 쉼없이)로 밤새도록 연주된다. 그 소리들이 얼마나 우렁찼던지 한여름에는 오디 열매를 떨어뜨리고, 초가 지붕 위의 박을 익게 하고, 고향집 바깥마당에 심어둔 보라색 감자꽃들의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올해는 풍년이 들겠구나." 어머니의 환희에 찬 말씀 한 마디가 나에게는 "올해는 월사금 안 빌리러 가도 되겠구나"로 들리는 것도 바로 이때다.

##개구리도 아이들도 조용해지는 가을

바람이 불 때마다 물결로 일렁이는 나락들의 '가을 기운은 도저히 못 말리겠다'는 즐거운 투정이 색깔에서 드러나기 시작한다. 푸른 벼들이 누렇게 변할 즈음이면 개구리들도 푸른 옷을 벗고 황금색 옷으로 갈아입는다. 개구리들의 여름밤 코러스도 종전 같으면 별나라까지 전해질 정도였지만 그 소리 또한 약해질 대로 약해져 실내악 내지 살롱뮤직 수준으로 내려앉고 만다. 쇠락이다.

여름밤 이병놀이를 한다며 온동네 고샅을 돌아다니며 벅적이던 아이들도 덩달아 조용해진다. 낮에 둔덕을 돌아다니며 삘기를 뽑았거나, 도랑에 둑을 막고 양동이와 세숫대야로 물을 퍼내고 미꾸라지를 잡았던 피곤이 아이들의 발목을 붙들어 맸는지도 모른다. "여름에 그렇게 쏘다녔으니 이제 공부 좀 해라"는 어머니의 엄명은 바로 삽짝 밖 출입금지로 이어진다. 옆집 태득이라도 찾아와 "활아" 하고 불러내면 좋을 텐데 그 녀석도 붙들렸는지 조용하다.

시골의 소문은 신문이자 방송이다. "실래골 밑 새못의 봇도랑에 물이 말랐다"는 소문이 돌면 다음날 하학 후의 동네 아이들은 모두 그곳에서 고기를 잡는다고 야단이다. 그러다가 농부들이 벼 베기 준비로 논에 물을 빼면 아이들은 다래끼 하나와 정지칼(부엌칼의 사투리)을 들고 물 빠진 논으로 모여든다. 논고동을 잡기 위해서다.

##삶은 논고동은 최고의 저녁 반찬

물 빠진 논에 숨어 있는 논고동의 숨구멍은 장마철 TV 화면에 비치는 태풍의 눈처럼 표시가 나게 마련이다. 칼을 깊이 찔러 파헤치면 굵은 논고동이 아무 저항 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때는 논고동을 잡으러 갔다가 물꼬가 열렸을 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붕어떼가 좁은 물웅덩이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곳을 만날 수도 있다. 그야말로 횡재다.

논고동의 맛은 말랑말랑하고 쫄깃쫄깃하다. 어머니는 내 바짓가랑이가 진흙 범벅이 되어 들어와도 소쿠리 가득한 그날의 수확을 보시곤 나무람은커녕 "어데서 이렇게 많이 잡았노"라고 격려를 해 주시곤 했다.

탱자나무 가시로 깐 삶은 논고동은 저녁 반찬으론 정말 최고였다. 논고동을 온갖 푸성귀를 썰어 넣고 초고추장과 함께 무쳐내면 별미 중의 별미였다. 지금은 농약 탓에 들을 빼앗겨 빼앗긴 들에서 논고동을 만날 수 없다. 이러다간 가을 속의 추억조차 빼앗기겠네.

수필가 9hwal@hanmail.net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