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 개봉관에서도 상연된 바 있는 영화 '프리다'는 멕시코 출신의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 영화이다. 그녀의 그림은 마치 "폭탄과 같다"라고 평자들은 말한다. 끔찍한 자기 상처를 사정없이 드러내는 심리적인 묘사와 함께 여성 육체의 모든 드라마를 그려내기 때문이다. 특히 자기 자신의 몸을 남성 욕망의 응시로서가 아니라 주체적인 여성의 시선으로 냉혹하리만치 리얼하게 사랑과 죽음, 분만과 낙태라는 여성 삶의 모든 서사를 그림 속에 아로새겨 넣는다.
그런 그녀의 그림 중에 '우주와 지구, 그리고 멕시코에서의 나와 디에고, 사랑의 포옹'이라는 긴 제목의 그림이 있다.
이 작품은 '사랑하면서도 완전히 결합할 수는 없고, 증오하면서도 헤어질 수는 없던' 연인 디에고의 나체를 젖먹이 아기처럼 작게 그려서 껴안고 있는 그림이다. 그리고 마침내 토착 원주민 모습을 한 대지의 품 안에 자기 생명을 송두리째 내어 맡기고 광활한 우주 속으로 스스로를 들어올린다.
많은 명화들을 접해 왔지만 그녀의 그림처럼 스토리텔링이 강렬한 작품을 본 적이 없다. 그림들마다 뜨거운 통증이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극진한 사랑의 메시지가 화폭 고요히 담겨 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삶의 상처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서 자기 존재와 인생을 긍정하며 치유되는 특별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렇듯 명작이란 그저 무심히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시공간을 초월하는 무한 감동을 불러온다. 이 무형의 전율이 만들어내는 기쁨의 값을 어찌 눈에 드러나는 물질의 무게로 측량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감동의 문화야말로 고단한 일상이 한순간 보석처럼 반짝일 수 있는 피안의 빛이며, 예술이 지닌 매혹의 힘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이번 여름방학 동안 내가 자주 오르내렸던 언덕이 있다. 1900년대 대구에도 몽마르트르 같은 언덕이 있었다. 1899년 12월 처음으로 그 언덕 아래로 십자가 모양의 계산성당이 한옥으로 축성되고(이 한옥 성당은 1900년 2월 화재로 전소되고 지금의 고딕식 계산성당 건물은 1902년 5월에 완공되었다), 그 후 시인 이상화, 화가 서동진과 이인성, 작곡가 박태준은 그 언덕을 오가며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만들고, 시를 쓰며 한국 근대 예술의 꽃이 된 중요 작품들을 피워냈다.
지금도 그 언덕을 오르면 푸른 담쟁이 '청라'가 자라고 있으며, 이은상이 대필했었다는 박태준의 노래비 '동무생각'을 볼 수 있다. 이 청라언덕 아래로 3'1운동길, 선교박물관, 의료박물관, 90계단, 상화고택, 약전골목, 제일교회, 신명학교, 매일신문사, 계산성당 등이 여름 나리꽃처럼 피어 있다.
이 청라언덕 일대를 올여름 나와 함께 답사하고 감동을 나눈 화가와 시인, 음악가, 사진작가들은 폭염을 가리듯 그 일대에 대한 정서를 '마음 박물관' 안에 담아 새로운 창작으로 이어갔다. 그리고 그 작품들이 이제는 갤러리 안에 입성해 곧 우리 갤러리가 마련할 가을 전시회 개막을 기다리고 있다.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라는 말은 박태준이 작곡한 노래 '동무생각'에 나오는 노랫말 가사이다. 이 노랫말에 따르면 사랑이란 '내게서 피어나는 것'이다. '네가 아니라 바로 내게서 피어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이다.
그렇다. 모든 사랑은 능동적이며 그 자리에서 스스로 피어오른다. 우리의 문화 예술도 그러한 사랑의 모습을 닮았다. 네가 아니라 내게서 피워 올려 너에게로 전하는 그 기쁨의 소중한 향기가 바로 예술이라는 꽃이고, 문화가 가는 길이다.
청라언덕은 대구의 근대 예술가들이 시와 그림과 노래로 담아낸 시적 의미 외에도, 치유와 복음과 교육이라는 예수의 3가지 선교사목 지침이 한 장소에서 구현된 전국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의미 있는 곳이기도 했다.
최근 시와 구청의 문화기획팀과 시민, 예술가들이 함께 진행하는 다양한 문화체험 프로그램들이 개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분주한 움직임 속에서도 우리가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옛 문화에 대한 활발한 조명 또한 지금, 여기의 삶을 위한 긍정의 꿈이며 과정일 뿐이다. 오늘의 감동, 오늘의 대구, 오늘의 정신을 향한 보다 건강하고 창의적인 문화기획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백미혜 대구가톨릭대 CU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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