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시간 내기가 힘들다는 그를 설득해 병원 여름휴가 첫 날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평일 진료시간은 오후 7시까지로 정해져 있지만 늘 8, 9시가 돼야 끝난다. 게다가 사전에 알아본 바로는 12월이나 돼야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정문관(57) 내과의원 원장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21년 재직했던 영남대병원을 떠나 개원한 지 6년째. 좀 더 여유로울 줄 알았더니 명성을 듣고 찾아온 환자들 때문에 오히려 더 시간을 쪼개 써야 할 형편이 됐다. 치료내시경의 선구자가 된 그의 인생을 들어보자.
◆한달에 스무번씩 응급실 호출
"농사 짓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서울대 공대를 가려고 했는데 한 친척이 의사를 권해서 의과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거창한 꿈이나 포부는 없었어요. 그저 돈도 더 벌 수 있고 출세하겠다 싶었죠. 다만 교수가 되고픈 꿈은 있었습니다."
그는 꿈을 이룬 셈이다.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누구나 인정하는 치료내시경 분야의 대가가 됐으니 아쉬울 것도 없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가면 무엇을 택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당연히 의사"라고 답했다. 남들이 마다하는 새로운 길을 걸으며 벅찬 보람도 느꼈고, 생명을 건진 환자들이 고마움의 눈물을 흘릴 때 가슴 뭉클한 감동도 느꼈다.
21년간 후학을 가르쳤던 교수로서 그는 '의사의 길'에 대해 나름의 철학이 있다. "내가 손해보겠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이 찾아옵니다." 1983년 처음 영남대병원 교수직을 맡은 뒤 15년 가량 하루가 머다하고 피를 토하는 환자 때문에 응급실 호출을 받았다. 한 달에 스무번 넘게 불려나간 적도 있었다. 소화성궤양출혈, 즉 식도나 위에서 피가 터져나오는 환자 때문. 밤 9시 30분쯤 퇴근해 늦은 저녁을 먹고 나면 어김없이 11시나 새벽 1시면 전화가 걸려왔다. 하지만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르지 않으면 스태프들을 나무랐다. "제가 안 가면 인턴이 피를 닦아내느라 고생하고, 환자는 자칫 치료시기를 놓치면 생명까지 위험한데 어떻게 안 나갑니까?"
어느 날 그는 피를 뿜어내는 환자를 보며 새로운 시술을 결심했다. 내시경으로 지혈제를 주사해서 바로 출혈을 멈추도록 하는 것. 당시만 해도 세계적으로도 드문 시술이었다. 다행히 첫 시술은 성공적이었다. 학회에 발표한 뒤 전국 모든 병원에서 이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전국에서 그를 찾아온 출혈환자는 1천640명에 이른다.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웬만한 치료내시경 모두 섭렵
그는 지역 병원에서 치료내시경의 효시격이다. 진단과 검사만 하는 줄 알았던 내시경으로 치료까지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 대장암을 예방하는 용종절제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시술은 1990년대까지 입원을 해야 가능했다. 자칫 시술 뒤 출혈이 우려됐기 때문.
하지만 그는 외래에서 용종절제술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소화기 출혈을 잡아낸 그로서는 도전해 볼 과제였다. 처음 학회에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출혈이 시작되면 다시 환자를 부를거냐?"며 비웃었다. 세계적으로 용종절제술 후 출혈은 0.4~2.7%. 1천 명이 시술받으면 4~27명이 출혈을 보인다는 뜻. 하지만 그가 한 해 1천300여 건의 시술을 했을 때 출혈은 단 한 건뿐이었다. 입원이 필요없다보니 하루에 훨씬 더 많은 환자를 볼 수 있었고, 환자 부담도 크게 줄었다. 무엇보다 작은 크기의 용종을 제거할 수 있었다. 과거엔 일정 크기 이상의 용종을 가진 환자만 입원시켜 제거한 탓에 대장암 발생 위험만 키웠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근 소화기전문병원에서 시술하는 웬만한 치료내시경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쳐갔다. 내시경적 역행성담관췌장조영술(ERCP)도 국내에서 시술 의사가 서너 명밖에 없던 때, 지역에선 그가 처음 성공했다. 만에 하나 발생할 사고에 대비해 외과의사를 뒤에 두고 시술했다. 지금은 제법 보편화된 초기 위암의 내시경 제거술도 그가 처음이었다. 이미 1989년부터 그는 초기 위암을 잘라냈다.
영남대병원 재직 시절 그는 '3관왕'이었다. 병원 수익에서도 단연 1위였고, 다른 병원에서 보내오는 환자가 가장 많은 의사이자 병원 직원들이 뽑은 가장 경쟁력 있는 의사이기도 했다.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아무리 대학병원 교수라도 쉼없이 공부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학회를 통해 자신이 배운 결과물을 공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매사에 재미를 찾는 긍정적 자세
대학병원에 있는 동안 80여 편의 소화기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1990년대 들어 국내 소화기 관련 학회에서 줄곧 좌장 역할을 맡았다. 서울지역 의사들은 흔히 '지방대학병원의 교수'라면 무조건 한 수 낮게 보지만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게으름을 피우는 후배들에게는 "자네 어머니라면, 가족이라면 그렇게 할래?"라며 매섭게 꾸짖었다.
"무엇을 하든 재미있다고 생각하면 재미있어집니다." 지금까지도 그를 버티게 한 원동력이다. 매사에 긍정적인 그는 새롭게 바꿀 때 느끼는 재미를 이야기했다. "맨발로 다니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신발을 파는 것이 어찌보면 불가능할 수 있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지닌 시장입니다." 처음 습관 때문인지 지금도 그는 대장내시경을 할 때면 하루 7시간씩 서서 일한다. 학창시절 꼬박 2시간씩 걸어서 등하교했던 덕분에 그나마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힘든 때도 많았다. 특히 시술 후 예기치 못한 합병증이 생길 때면 괴로웠다. 암이 소화기 전체에 퍼진 60대 여성 환자 때문에 곤욕도 치렀다. 할 수 있는 시술은 다 했지만 외과 수술을 앞두고 갑자기 숨진 것. 환자의 자녀들이 찾아와 항의했다. 대수롭지 않다고 했는데 왜 숨졌냐는 것. 알고보니 환자의 남편이 자녀들이 걱정할까봐 쉬쉬한 탓이었다. 결국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의사 가운을 벗어버리고 싶었지만 다시 환자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의사입니다. 힘들고 괴로울 때만 생각하면 의사 못합니다. 밝게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환자를 떠올리며 다시 진료실에 들어가야죠. 그게 제 운명처럼 느껴집니다."
일에 쫓겨 사느라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 가장 미안하다고 했다. 매년 학회가 봄, 가을에 열리다보니 가족 나들이 한 번 제대로 못했다. 그런 중에도 자녀들은 잘 자라 주었다. 맏아들은 서울대 의대에 재학 중이다. 청출어람을 기대해 본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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