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 9시 대구 수성못. 둑길을 따라 설치된 벤치마다 빈 자리를 찾기 어렵다. 벤치에 앉은 시민들은 못 한가운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잠시 뒤 못 한가운데서 시원한 물줄기가 솟아오르더니 오색찬란한 빛과 어우러져 화려한 쇼가 펼쳐진다.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분위기 있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온다. 산책하던 이들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못 한가운데로 눈길을 돌린다. 물줄기는 음악에 맞춰 마치 파도를 치듯 춤을 춘다. 이도영(38·대구 수성구 지산동) 씨는 "매일 저녁을 먹은 뒤 분수쇼를 하는 시간에 맞춰 산책을 나온다"며 "분수쇼를 보고 있으면 가슴 속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분수 전성시대다. 최근 몇 년 사이 전국적으로 분수가 경쟁적으로 만들어지면서 이제는 어딜 가든 화려한 분수쇼를 보는 게 어렵지 않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의도를 내세우지만 일부에서는 별다른 특색 없이 너도나도 규모가 큰 분수를 설치하는 것은 예산 낭비라고 지적하고 있다.
◆분수(噴水)에 빠진 대구
대구에서 분수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자동차로 신천대로를 달리다 보면 신천에서 하늘 높이 치솟는 물줄기를 잇달아 볼 수 있다. 국채보상운동공원이나 두류공원, 교차로 등에서도 분수 주위에 모여 더위를 식히는 시민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대구시에 따르면 대구의 분수는 현재 모두 104개. 무덥기로 전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대구의 특성상 분수는 필연적인 시설일 수도 있다.
몇 년 사이 분수 종류도 다양해졌다. 단순히 공중으로 물을 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음악에 맞춰 마치 율동하듯 움직이는 음악분수, 음악과 화려한 영상이 혼합된 영상음악분수, 편평한 바닥에서 물줄기가 솟아오르는 바닥분수 등 비슷한 모양을 찾기 힘들 정도다.
가장 유명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수성못에 설치된 영상음악분수다. 2007년 설치된 이 영상음악분수는 부력체의 길이가 90m, 폭 12m, 물줄기 높이 70m다. 특히 가로 40m, 높이 20m의 워터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영상과 레이저쇼는 밤마다 장관을 연출한다.
달서구 와룡공원의 바닥분수도 요즘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 11월 사업비 12억원을 들여 만든 이 바닥분수는 네오스톤과 화강암 판석으로 꾸며진 바닥에서 물줄기가 뿜어진다. 면적도 3천480㎡로 꽤 큰 편이다. 야간에는 LED 조명에서 색색의 빛을 쏘아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바닥분수가 생긴 후 이 공원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김현지(34·여·대구 달서구 이곡동) 씨는 "과거에는 노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으나 최근에는 아이 손을 잡고 젊은 부모들이 많이 찾는다. 아이들은 발 밑에서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정말 좋아한다"고 했다.
달서구 월광수변공원의 음악분수는 대구 음악분수의 원조이다. 달서구청이 2003년에 설치한 이 음악분수는 중앙 분수와 보조 분수, 시스템 분수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중앙 분수는 최대 높이 50m까지 물을 쏘아올린다. 야간에는 음악에 맞춰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춤을 추는 분수쇼가 펼쳐진다.
◆전국은 음악분수 열풍
최근 전국 도시들이 경쟁하듯 음악·영상분수를 설치하고 있다. 가는 곳마다 세계적인 규모, 전국 최대 등의 수식어를 붙일 만큼 엄청난 규모의 분수들이다.
부산 사하구 '다대포 꿈의 낙조분수'는 올해 3월 세계 최대 바닥분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원형지름 60m, 최대 물 높이 55m, 물 분사 노즐 수 1천46개, 조명 511개, 소분수 24개 등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이 낙조분수는 사하구청이 70여억원을 들여 지난해 6월 준공했다. 다대포 해수욕장 입구에 있는 이 낙조분수는 관광객 증가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해수욕장 인파가 올해의 경우 이달 8일까지 270만9천 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167만2천 명에 비해 60% 이상 증가했다.
목포시는 무려 135억원을 들여 해양 음악분수를 지난 6월 준공했다. 배 모양으로 만들어진 이 분수는 바다에 설치된 것이 특징으로 길이 135m, 폭 60m에 분사 높이 최고 70m를 자랑한다. 이 또한 세계 최대 규모다. 특히 야간에는 화려한 불빛과 다양한 물보라로 관광객의 이목을 끌고 있다. 시는 이 분수를 랜드마크이자 관광명소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서울시도 2008년에 반포대교의 양측으로 한강물을 끌어올려 다시 20m 아래의 한강으로 떨어뜨리는 새로운 개념의 교량분수를 선보였다. 반포대교 상·하류 각각 570m씩 1천140m가 한강 아래로 물을 뿜는 거대한 분수를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2008년 말 '세계에서 가장 긴 교량분수'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영덕도 고래불 해수욕장에 지난해 동해안 최대 규모의 음악분수를 설치했다. 사업비 23억원이 들어간 이 음악분수는 원형 3단으로 지름 20m, 높이 5m로 제작됐다.
◆일부선 과열 비판
지자체마다 시민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관광객을 끌어들인다는 명분으로 분수 설치에 적극적이지만 일부에서는 아무런 특색 없이 규모만 강조하는 설치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지자체들의 무분별한 설치 경쟁이 우리 실정에 잘 맞지 않다는 것이다. 물을 이용한 볼거리는 누구나 좋아하지만 사계절이 뚜렷하고 겨울이 긴 우리나라에서는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지역의 한 조경학과 교수는 "분수는 길어봐야 늦봄부터 가을까지 작동하는데 나머지 기간에는 특별한 볼거리도 없고 관리도 어려워 공간활용도가 많이 낮다"고 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음악분수는 국내에서 흔하지 않아 관광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있었지만 지금은 여기저기서 음악분수를 만들다 보니 상품성이 많이 떨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남이 하니 우리도 한다는 식의 무분별한 분수 설치는 전형적인 전시행정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전국적으로 분수가 건설될 때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문경은 지난 6월 흥덕동 영강천 생활체육공원에 17억원을 들여 음악분수를 설치, 가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이 인적이 드문 하천부지라 예산만 낭비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많았다. 목포도 130억원짜리 해양음악분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시민단체들이 인근 바다의 환경오염이 우려되고 너무 많은 예산이 투입된다고 비판하면서 논란이 컸다.
대구의 한 구청 관계자는 "음악분수를 보면 처음에는 '와' 하고 신기해하지만 몇 번만 봐도 지겨워지는 게 사실이다. 공연 형태 등을 주기적으로 바꾸어야 하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찮다"고 했다. 지역의 한 대학교수는 "상당수 분수가 규모만 클 뿐 주변 환경과 잘 맞지 않게 건설돼 예산이 낭비되는 경우가 많다"며 "분수는 공사비나 유지비가 무척 많이 들어가는 만큼 건설할 때부터 지역 고유의 역사성과 문화를 나타낼 수 있도록 철저하게 계획한 뒤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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