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앞 아홉 개의 못 있어 '九潭마을'

입력 2010-08-04 08:45:46

구담마을에 가장 먼저 들어온 기계유처사비.
구담마을에 가장 먼저 들어온 기계유처사비.
양반들이 살았던 안골의 집
양반들이 살았던 안골의 집
소작이나 장사를 하던 뒤지골의 집
소작이나 장사를 하던 뒤지골의 집

마을 앞 낙동강 변에 아홉 개의 못이 있었다고 '구담(九潭)'으로 불린다. 고물소, 강정소, 메밀소, 작은용문소, 큰용문소, 사발소, 담방소, 비로소, 박웅덩이 등이다. 모래사장 움푹 파인 웅덩이에 강물이 불어나 물이 고인 곳이다. 물웅덩이, 소(沼)인 셈이다. 1970년대 안동댐이 건설된 뒤 넓은 모래사장이 사라지면서 소(沼)의 흔적도 대부분 쓸려갔다. 옛 나루터 인근 용문바위 앞에 여자들이 주로 목욕했다는 강정소의 흔적만 엿볼 수 있다.

구담의 나지막한 구릉 사이에는 아홉 개의 골짜기도 있다. 정관하골, 장골, 언덕골, 재궁골, 비전골, 절골, 성지골, 뒤지골, 안골 등이다. 안골에는 솟을대문이 웅장한 종가와 400년 이상 된 고택이, 뒤지골과 성지골 등에는 바위산을 타고 작은 집들이 밀집해 있다.

구담마을은 500여년 간 내려온 순천김씨와 광산김씨 집성촌이다. 지금은 구담1리 121가구, 구담2리 240가구로 낙동강을 끼고 있는 최대 규모 마을이다. 기계유씨가 가장 먼저 마을로 들어왔고, 이후 평산신씨도 살았다. 상주목사 권집경이 구담촌에 살았고, 이후 순천김씨가 터를 잡았다.

옛날 유씨들이 동네 입구에 '유처사비'를 세워놓았는데 터잡이 성씨들이 '잔망스럽다'고 이 비를 빼 강정소에 버렸고, 이후 아이들 초상이 많이 생겼단다. 어른들이 물에 빠진 비를 찾지 못하고 새로 만들어 세웠는데, 그 뒤로는 흉한 일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순천김씨 입향조(마을에 처음 들어온 이)는 권집경의 사위인 국담 김유온이다. 국담은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452년 시국에 불안감을 느끼고 처 고향인 구담으로 내려와 일가를 이뤘던 것. 광산김씨 입향조는 국담의 손녀사위인 담암 김용석. 담암은 연산군 때 당쟁과 사화가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이를 피해 구담으로 낙향했다. 담암은 '내 자손들은 벼슬을 하지마라. 공부해서 선비노릇은 할망정 벼슬은 하지마라'고 유언했다. 이를 지키지 않은 채 성주목사를 지낸 자손은 한 동안 구담에서 조상 제사도 모시지 못했단다.

김병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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