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논단] 홍국영의 후예들

입력 2010-08-02 08:51:20

홍국영의 후예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정조 3년(1779) 9월 26일 도승지 홍국영(洪國榮)은 정조에게 '5월의 일' 이후 나랏일과 민심이 안정되지 않고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이 조정에 있기 때문이라며 도승지와 숙위대장을 사직하고 떠난다. 권세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던 홍국영이 갑자기 사직하자, 조정의 대소 관료들은 까닭을 모르겠노라며 정조에게 홍국영을 말리라고 다투어 청했다. 혹 다른 꿍꿍이속이나 있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홍국영의 사직을 허락한다.

정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홍국영의 나이는 29세였다. 그 나이에 권세를 쥐어 나라를 뒤흔들었으니 어지간히도 빠른 출세다. 홍국영이 사직한 날은 스스로 밝히고 있듯 1772년 세자시강원 설서(說書)가 되어 동궁으로 있던 정조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그는 3년 반 위험 속의 정조를 보필하고 3년 반 권세를 누렸다. 권세를 누린 시간이 너무 짧지 않은가?

홍국영이 '5월의 일'이라 한 것은, 바로 원빈(元嬪) 홍씨(洪氏)가 죽은 사건이다. 알다시피 홍씨는 홍국영의 누이동생이자 정조의 후궁이었다. 1778년 6월 홍씨가 원빈이 되었을 때 나이 불과 열 셋이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정비(正妃)인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을 알고 어린 누이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던 것인데 그 누이가 궁에 들어간 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1학년 나이인 누이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낸 홍국영의 의도는 뻔하다. 정조의 뒤를 이어 자기 누이 소생을 왕으로 삼아 권세를 영원히 누리려는 것이었다. 원빈이 죽자 홍국영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이인의 아들 이담의 군호(君號)를 상계군에서 완풍군으로 바꾸고 늘 자신의 '생질'이라 불렀다. 이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정조의 뒤를 잇게 하겠다는 꿍꿍이였다.

정조실록은 홍국영이 갑자기 사직을 청한 내밀한 이유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다만 정조의 말에서 추측할 만한 단서가 있다. 정조는 홍국영의 자진 사퇴 이유를 묻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경들은 말하지 말라. 이것이 그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고 그의 마지막을 보전해 주는 도리다. 내 어찌 아무 생각 없이 그랬겠는가?" 정조의 말을 미루어보건대, 홍국영 자신이 아니라 정조가 홍국영에게 권력을 내놓고 물러나게 만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홍국영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 날뛰는 것을 정조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도 물론이다. 이후 조정에서 홍국영에 대한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지지만 모두 "내 어찌 아무 생각 없이 그랬겠는가?"라는 말의 여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홍국영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 알다시피 당시 조정에는 정조의 등극을 저지하려는 세력이 득실거렸던 바, 영민한 홍국영이 기지를 발휘해 그들로부터 정조를 보호했던 것이다. 홍국영이 없었더라면 정조는 아마도 왕위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정조도 그것을 인정했다. 야사는 정조가 홍국영에게 '거병범궐(擧兵犯闕)', 즉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는 역모만 꾸미지 않으면 죽이지는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한다. 정조의 전폭적인 신임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29세에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쥔 홍국영은 시정잡배의 말투로 노신(老臣)과 공경대부를 능멸했고 그가 높은 평상에 맨발로 다리를 뻗고 앉아 있으면 재상들이 아래서 절을 했다고 전한다. 권력의 남용이 눈에 선하다.

홍국영은 무슨 생각으로 정조의 즉위를 도왔던 것인가? 정조를 도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쳐 보자고 생각했던 것인가. 오직 권력을 지키기 위해 날뛰고 권력을 남용했던 뒷날 행각을 보건대 결코 아닐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만드는 데 공을 세웠다는 사람들이 있다. 국민의 복리는커녕 특정 지역 사람들이 요직을 차지하여 국가 권력을 사유화한다는 소문이 낭자한데다, 불법 사찰로 국민을 사찰하여 개인의 삶을 결딴내는 것을 보니, 홍국영의 후예를 보는 듯하다. 부디 기억하시라, 홍국영의 권력은 3년 반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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