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민간인에 대한 정보기관의 감시가 본격화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의 한 사람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때부터였다. 민간인 감시는 처음에는 미국 내 나치 추종자나 좌파 세력에 집중됐으나 나중에는 정적에게까지 확대됐다. 이를 위해 루스벨트는 주로 연방수사국(FBI)을 활용했으나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별도의 첩보 조직을 두기도 했다. 이 조직은 국무부의 '특별긴급사태' 자금을 재원으로 운용됐다. 그는 또 FBI와 법무부를 동원해 언론계의 반대자들은 물론 아내 엘레노어의 호텔 방까지 도청했다. 이러한 '전통'은 닉슨 대통령까지 이어졌다. 1975년 미 상원 정보위원회 조사 결과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닉슨 등 후임 대통령 모두 정적에 대한 도청과 정보 수집을 FBI에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존슨의 경우 1964년 대통령 선거 때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도청하는 것은 물론 FBI를 동원,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도청해 복잡한 여자관계를 언론에 흘리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 국민은 대통령의 이러한 불법행위에 비교적 관대했다. 케네디의 경우 언론은 엽색 행각을 감춰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닉슨 대통령 때부터 이런 관용적 태도는 사라져버렸다. 전쟁이나 외교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동원된 방식으로 미국인의 일상생활을 규율할 수 없다는 인식, 미국의 법적'도덕적 책임이라는 전통을 훼손하면서 정의를 추구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자리 잡은 것이다. 닉슨의 전임자 때라면 문제도 안 됐을 워터게이트 사건에 미국인들이 보여준 거부반응은 이런 시대조류의 변화를 반영한다.
이 같은 미국 현대사의 흐름은 우리 현대사에 그대로 오버랩된다. 6'25를 거치면서 경찰과 정보기관에 의한 민간인 사찰은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북한과의 사활을 건 체제 경쟁은 이를 더욱 가속화했다. 대학 캠퍼스에는 정보과 형사들이 버젓이 돌아다녔고, 지적 호기심에 '금서'를 가방 속에 넣어 다니다 '재수 없게' 불심검문에 걸려 곤욕을 치르는 것이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언론과 '운동권'이 이에 저항했지만 북한이라는 현실적 위협과 국가안보라는 지상명령 앞에 일반 국민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가 되고 인권의식이 성장하면서 민간인 사찰에 대한 국민의 체감도는 낮아졌지만 그렇다고 민간인 사찰이 역사책 속으로 물러났다고 믿기는 어려웠다. 어두웠던 과거의 기억 때문이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파문은 그런 의구심을 되살려놓고 있다. 현재 당사자의 주장에 대해 총리실이 함구하고 있어 정확한 사실은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겠지만 드러난 정황으로 보아 총리실이 정부에 비판적인 시민을 불법 감시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여기서 의문은 꼬리를 문다. 총리실이 왜 고유 업무가 아닌 민간인 감시에 나섰을까? 과연 총리실뿐일까? 총리실이 그렇다면 역시 민간인 감시가 고유 업무가 아닌 다른 기관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을까? 이런 의문은 시대가 달라졌지만 민간인 감시라는 망령은 새로운 육신(肉身)으로 갈아입고 여전히 시민의 일상을 지켜보고 있다는 두려움을 낳고 있다. 이런 생각이 '오버'이길 간절히 바란다.
스탈린은 죽을 때까지 암살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음식은 먹기 전 실험실에서 성분을 분석하도록 했고 집무실과 침실의 공기가 독가스로 오염됐을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는 주치의도 영국 첩자라고 의심하며 몸에 손도 못 대게 했다. 전 인민에 대한 감시와 피의 숙청 뒤에는 이런 심약함이 숨어있었다.
마찬가지로 이 정부의 민간인 사찰은 자신감의 상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촛불사태라는 엄청난 홍역을 치렀으니 자신감을 잃을 만도 하다. 국민의 든든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은 자신감의 상실로 이어지고 이는 정치적 반대자의 감시라는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민간인 사찰은 국민의 실망과 반발을 불러올 뿐이다. 왜 촛불사태가 일어났으며 왜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는지 진실하게 반성하고, 음습한 밀실로의 회귀가 아니라 넓고 환한 광장으로 나올 때 국민은 돌아선 마음을 되돌릴 것이다.
鄭敬勳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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