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남희의 즐거운 책읽기] 전쟁과 사회/김동춘 /돌베개

입력 2010-06-24 09:51:43

끊임없이 재현되는 비극의 원형으로서 한국전쟁을 보는 새로운 관점 제공

『한국을 '도와주러 온' 미군의 총격을 당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으나 '사상범으로 몰릴까봐' 50년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살아온 충북 영동의 노근리 노인들에게 전쟁은 여전히 과거의 일이 아니다. 필자가 현장조사차 방문했던 전북 남원의 한 마을에서는 1950년 11월 8일 퇴각하는 인민군을 잠재워 주었다는 이유로 주민 86명이 아침밥도 다 먹기 전에 동네 앞 논바닥에 끌려 나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국군에게 집단학살을 당했다. 피학살자의 가족을 비롯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릴까봐 그 사건을 단 한번도 공개적으로 발설한 적이 없었다. 지난 2월의 어느 날, 이 동네 경로당에 앉아 있던 무표정한 노인들을 보면서 필자는 역사의 시계가 50년 동안 멈추어 선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분노할 능력도 기억을 되새김질할 능력도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 동네에서는 '그날 이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잔인한 망각의 세월이었다.』(김동춘, 『전쟁과 사회』중)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들이 잇따라 기획되고 열린다. 전쟁 발발을 기념하다니! 과연 그게 기념할 만한 일일까? 전쟁 발발 60주년에 평화와 화해의 분위기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한국전쟁에 대한 책을 몇 권 찾아보았다. 2005년 6월 출간된 서울대 박태균 교수의 『한국전쟁』(책과함께), 이 책은 이데올로기 편견을 걷어낸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을 목표로 전쟁의 발발과 분단의 원인, 전쟁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들을 종합하여 무리 없는 해석과 정리를 하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지만, 독특한 시각과 해석은 찾기 어렵다.

같은 해 10월에 출간된 『전쟁과 기억』(한울)이라는 책을 살펴본다. '마을공동체의 생애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여러 연구자들이 직접 한국전쟁 관련 생존자들의 '구술'을 녹취하고 '기억'을 채록하였다. "우리같이 무식하니 밥만 먹고 농사나 짓는 못난둥이만 살려두고 장동 김씨들 가운데 인물들은 다 씨를 말려버렸다"는 장동마을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은 나의 부친으로부터 들었던 말과도 일치했다. 평범한 마을의 보통 사람들이 경험한 전쟁의 기억이 어쩌면 실체적 진실에 더 가까울 수도 있을 것이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의 『전쟁과 사회』는 전쟁을 일으킨 주체이자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이용하는 국가라는 실체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한다. 저자는 "자유주의나 공산주의나 그 체제, 이데올로기에는 차이가 있어도 개인을 노예로 삼는 국가주의인 데서는 다름이 없다. 모든 권력은 필연적으로 자기보다 강한 대적을 불러일으키고야 만다. 그러므로 국가주의가 있는 한 평화는 있을 수 없다. 남북 분열의 책임은 국가주의에 있다"라고 한 함석헌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국전쟁을 단순히 좌우 대립, 민족해방, 계급 갈등의 틀로만 봐서는 안 되며 근대화 혹은 국가주의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전쟁은 이제 국가주의의 해석 틀에서 벗어나 인권과 평화의 관점, 민족 재통합의 도정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정치공동체 건설의 전망 속에서 새롭게 접근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한 문제의식 하에 국민을 버리고 피란을 떠나버린 국가, 대혼란, 정치적 책임과 한계, 신이 된 국가, 전쟁 중 학살의 실상과 특징 등 한국전쟁의 주요 국면을 살펴본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재현되는 비극의 원형으로서 한국전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새벗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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