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소(牛)

입력 2010-06-24 07:53:11

2년 전 광우병 사태 때는 미국 소나 한우나 도매금으로 같이 취급하며 외면하더니 올해는 구제역 때문에 닥치는 대로 살처분해댄다. 애지중지 기르던 소 사십여 마리를 살처분한 농부가 자살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린다. 자식같이 키우던 소를 무더기로 땅에 묻는 농부의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작년 초 이충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에서 삼십 년간 노인의 친구였던 소가 죽은 후에 화면에 클로즈업된 노인의 멍한 눈빛이 잊히지가 않는다.

우리들 삶의 가까이에서 한 식구처럼 대접받던 예전의 소 처지에 비하면 요즘의 소 신세는 말이 아니다. 지금은 대부분 육우 용도에 그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는 농가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였다. 농기계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에는 큰 일꾼이었고 일 년에 한 번씩 낳는 송아지를 통해서 돈 마려운 농가에 살림 밑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소의 역할이 이러하니 소에 대한 대접은 말할 것이 없다.

삼시 세 끼 먹는 것은 물론이고 거처하는 소 외양간까지 어지간한 사람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았다. 사실 애들 많은 집의 다섯째나 여섯째 정도 되면 부모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고 제때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부모들의 중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집에 기르던 소에게 제때 소죽을 안 먹였거나 굶기면 집안에 난리가 났다.

간혹 형제들 간에 싸움이 나서 어느 놈의 눈퉁이가 방팅이가 되어도 부모들은 "종나구들 밥 처먹고 할 짓 없어서 싸움질이나 한다!"하고 고함 한 번 치면 그만인데 만약 맞은 놈이 분풀이로 소에게 주먹질이라도 하는 날에는 "야 이놈으 손아! 와 죄 없는 소를 때리노. 소가 니보고 뭐라 카드나?"하며 소 편을 들고 소 때린 죄로 부지깽이 세례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그뿐인가? 네댓 명의 형제들이 한방에 우글대며 서로 아랫목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을 치고 사생결단으로 이불자락을 끌어당기며 잘 때도 소는 보릿짚을 푹신하게 깔아 놓은 일인실 외양간에서 두툼한 외투까지 등에 걸치고 자니 소 팔자가 우리들 팔자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았다. 소가 임신하면 대접은 더 확실해서 허연 메주콩을 한 바가지나 소죽에 넣어주니 소죽이 콩 반 여물 반이다. 허연 콧김을 뿜으며 맛있게 콩 섞인 소죽을 먹어대는 소를 보면 부럽다 못해 샘이 나서 엄마 몰래 소의 옆구리를 한방 쥐어박고 쉽지만 그 순한 눈을 보고 슬그머니 손을 내리고 만다.

가끔씩 소에 관한 뉴스를 들을 때면 오랜 친구 소식을 듣는 것처럼 반가운데 요즘에는 자꾸만 좋은 소식보다 안 좋은 소식이 더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오랜 세월 동안 함께해 온 소와의 인연을 사람들이 너무 쉽게, 또 너무 빨리 바꿔 버려서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대경대표 최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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