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공중전화

입력 2010-06-19 07:28:19

"뚜~ 찰칵, 3분 1통화 20원…벌써 아련한 추억 속으로"

♥ 약속시간 늦은 엄마, 전화는 안되고…

첩첩산중이 고향인 우리는 눈만 뜨면 밭으로 가야 했기에 밭일이 하기 싫어 이리저리 잔머리를 잘 굴렸다.

동생은 시내 나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면서 엄마를 졸랐고 열심히 공부한다는 등쌀에 허락을 얻어낸 동생은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다. 가만 보면 예나 지금이나 우등생이 되길 바라는 부모 마음은 똑같다. 이렇게 도심 생활을 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굶고 다닐까 걱정이 되어 한달에 한번 정도는 오셨다. 오실 때면 시골에 흔한 반찬을 한보따리 가져오셨고 엄마가 오시는 날은 동네 잔칫날 같았다. 도심 속에는 전부 귀한 것이니 좋아하셨다. 그 덕에 자취 생활도 편하게 하고 있던 어느 날 먼동이 틀 무렵 북부정류장에 마중 나오라는 전화가 왔다.

약속 시간에 맞춰 북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고향 버스만 지겹도록 기다려도 엄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갑자기 머리에 스치는 이상한 잡생각에 불안하기 시작했고 난 공중전화를 찾아 자취생활하는 주인집으로 전화를 했지만 어머니는 안 계셨다.

다시 고향집부터 친인척 집으로 연거푸 전화를 해도 안 계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불안하고 초조하게 간이 다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혹시 지금쯤 자취집에 도착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전화를 하려는데 잔돈이 부족했다. 구멍가게에서 잔돈을 바꾸면 될 터인데 그때는 그 생각도 안 들었다. 차를 기다리는 아주머니한테 사정 이야기를 하고 잔돈을 얻어 공중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가 전화를 하려는데 어머니가 보였다. 얼마나 반갑던지. '엄마'라고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불렀다.

아기 머리만 한 무에 무청시래기, 콩, 깨 등등 어머니가 손수 농사지은 잡곡들을 담은 커다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오셨다.

지금도 공중전화 박스를 보면 그때의 엄마 얼굴이 떠오른다.

이유진(대구 북구 복현2동)

♥ 휴대전화 등장 후 공중전화 썰렁

20년 전만 해도 동대구역 앞 공중전화에는 늘 줄 서 기다리는 사람으로 복작거렸다. 지금은 은행입출금 단말기 앞에나 사람들이 줄 서 있지, 아무도 공중전화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없다.

공중전화기조차 잘 찾아볼 수가 없다. 어쩌다 전화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어 바라보면 어느 나라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통화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외국인 근로자인 듯하다.

휴대폰이 보편화된 지금 공중전화 한 통화의 가격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동전을 넣던 전화기에서 어느 순간 카드를 넣는 전화기가 등장했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신기하고 좋아라 했다. 공중전화카드가 자석에 망가져 바꾸러 간 적도 허다했다.

그래서 내가 결혼하던 해 감사의 인사를 충전된 공중전화카드로 했다. 전신전화국에서는 알록달록 예쁜 카드를 만들어 판매했다. 신랑신부 인형이 인사하는 공중전화카드에 '축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란 문구까지 넣어서 신혼여행을 갔다와 인사하면서 드렸다. 다들 좋아하셨고 심지어 내가 인사를 빠트렸던 분들 중 "나도 공중전화카드 줘" 하시는 분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기념으로 나중에 쓴다고 한 장 남겨 두었는데 그 카드를 보면 세상이 참 빠르게도 변해 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처음 삐삐가 나왔을 때만 해도 삐삐에 뜬 전화번호를 보고 공중전화를 이용해야 했고 시티폰이라고 해서 받는 전화만 가능한 전화기를 거쳐 지금은 유치원 아이들까지 휴대전화를 목에 걸고 다니니 공중전화가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우리 집 큰아이는 휴대전화가 없었을 때 공중전화에서 콜렉트 콜 전화를 자주 사용했다. 그 전화가 올 때마다 어디인지 위치를 물어 저장해 두었기에 지금은 전화번호가 뜨면 아이가 어디쯤에서 전화하고 있는지 금세 안다. 큰아이는 작년에 전화기를 사주었기에 공중전화 할 일이 잘 없지만 이젠 작은 아이가 콜렉트 콜 전화를 한다. 큰 아이 때 입력해둔 번호 덕분에 작은 아이의 위치 파악을 하면서 전화를 받는다.

아이들이 어른보다 똑똑하다. 콜렉트 콜 전화를 맘대로 걸어댄다. 휴대전화의 등장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중 가장 인기 없어진 것이 공중전화가 아닐까.

박경아(대구 수성구 황금동)

♥ 밤새워 통화시도, 그녀는 받지않고…

1989년 12월 26일 밤. 한 남학생이 공중전화 박스에서 어딘가로 끊임없이 전화를 하고 있다. 손에 든 십원짜리 동전이 끊임없이 공중전화를 통과했다. 하지만 받는 사람이 없다. 상대방은 '통화중'. 수신인 없는 전화를 밤새도록 해댔던 사람이 바로 젊은 시절의 나다.

그날은 어찌나 추웠는지,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내 청춘에 그렇게 추웠던 밤은 없었다. 그 받지 않는 전화의 주인공은 오랫동안 만난 여자 친구였다. 9살 때부터 만났으니 자그마치 15년의 세월이다. 동네 친구였던 그녀는 언제나 내가 손만 뻗으면 그 자리에 있어주었다. 그래서 나와 너, 우리의 구분도 제대로 없을 만큼 우리는 친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연인으로 발전했다. 집안 어른들끼리도 잘 알고 계셔서 우리는 누구보다 부러움을 받는 연인이었다. 우리는 종종 여행을 함께 다닐 만큼 가까웠지만 나는 그녀를 지켜주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고 언제나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해 겨울에 접어들 즈음, 우리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사소한 문제로 다투었고 그 후 서로 연락이 뜸했다. 나는 그녀와 언제나처럼 다시 화해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을 통해 그녀의 소식을 들은 나는 너무나 참담해졌다. 그녀는 생애 처음 소개팅으로 공대 남학생을 만났고 그의 적극적인 구애로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것이 크리스마스 이브. 나는 그때부터 줄곧 그녀에게 연락을 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26일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새벽 5시 30분, 마지막 시도를 끝으로 나는 돌아섰다. 그와 함께 내 청춘의 사랑도 접었다. 한겨울 공중전화 박스에서, 그녀를 보내야 했고 나는 비로소 인생을 어렴풋이 배웠다.

한무석(대구 서구 비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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