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흥의 책과 예술]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박지호 지음/ 예담 펴냄/ 1만3천원

입력 2010-06-16 07:26:57

실패와 좌절 끝에 다시 또 희망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길 그려

이 엄중한 내면의 목소리가 언제나 거듭 들린다. "여기서 떠나라! 앞을 향해 나아가라, 방랑자여! 너에게는 아직 많은 바다와 땅이 남아 있다. 네가 누구와 더 만나야 하는지 누가 아는가?"-프리드리히 니체-

십년 전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갓바위를 올랐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자신을 깨달아가는 길이라는 생각 때문에 매번 백팔배를 하기는 했지만 무엇을 간절히 기도하지는 않았다. 그저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한과 살아갈 날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으로 세기말의 우울에 젖고 있었다. 그랬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뒤에 남는 것은 자신에 대한 모멸과 자책뿐이었다. 그 어떠한 변명이나 이유도 젊은 날의 신념을 먹고사는 것에 팔아버린 것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달아나고 싶었다. 나라는 사람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슬픈 영혼의 상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삼천배를 끝낸 어느 날 새벽, 짐을 꾸렸다. 어쩌면 그렇게 여행은 지극히 거칠고 서툰 사람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부처가 걸었던 길을 걸으며 만났던 것은 사람이었다. 학생운동이란 것을 하면서 정말 느닷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이론들이 가렸던 사람들이 그 길 위에 있었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여전히 사람에 대한 믿음을 안고 살아가는 1980년대 학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상의 변화를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한 그 실패와 좌절의 끝에서 다시금 희망이라는 길을 라틴아메리카의 사람들을 통해서 저자는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브라질의 브라질리아(Brasilia)에서 모더니즘에 코뮤니즘의 정치적 이상의 결합을 시도한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 곳곳에 노동자들과 빈민의 여신으로 남아 있는 에비타 에바 페론(Evita Eva Peron), 천식이라는 천형에 시달리면서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멈추지 않았던 체 게바라의 고향, 코르도바(Cordoba), 시인 파브로 네루다((Pablo Neruda)가 친구였던 아옌데(Allende)대통령의 사망 뉴스를 듣고 의식을 잃은 칠레의 산티아고(Santiago), 세계 3대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와 그의 아내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애증이 묻어있는 멕시코시티, 6개국 12개 도시, 3만㎞를 달리며 작가는 라틴아메리카가 세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마치 좌파 이론의 경연장처럼 레닌식 공산주의와 아옌데식 선거 사회주의, 산디니스타 해방전선의 마오이즘과 체 게바라의 국제 게릴라주의가 공존하는 사회, 실패와 패배 속에서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이야기는 몰아붙이기에 열중하는 권력에 경종을 울린 이 나라의 백성들과 닮아 있다.

여행자에도 등급이 있다고 니체는 말한다. 여행하면서 여행자로 보이기를 바랄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먼 여행자, 스스로 세상을 관찰하는 여행자, 관찰하면서 무엇인가를 체험하는 여행자, 그리고 관찰하며 체험한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삶에 동화시키는 여행자, 우리가 살아가면서 희망을 보는 것과 만드는 것은 어떤 여행자로 살아가느냐의 문제이고 비록 그것은 자신의 몫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라는 가치를 발견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여행작가'㈜미래티엔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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