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 시금장

입력 2010-06-10 11:39:43

보리밥과 찰떡 궁합…시금털털한 밥 도둑

자녀들의 혼인을 앞둔 부모들은 궁합을 본다. 남녀의 궁합이란 게 맞지 않는 것이 없을 터이지만 사주쟁이들은 더러 딴죽을 건다. "겉궁합보다 속궁합이 안 좋구먼." 남녀의 태어난 생시를 맞춰보고 궁합이 맞느니 안 맞느니 따지는 것은 애당초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사주집마다 붐비는 것을 보면 괜한 트집이 한몫을 하나 보다.

'궁합을 본다'는 것은 결국 조화의 가능성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사람만 궁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삼라만상이 어쩌면 적절한 궁합 속에 생성되고 배치돼 존재하는 것은 혹시 아닐까. 그리고 음식에도 궁합이 있다. 남녀끼리 궁합이 맞지 않으면 이혼이란 손쉬운 방법을 통해 갈라서면 되지만 음식의 궁합이 맞지 않으면 배탈을 일으키거나 자칫 목숨을 잃는 경우도 생긴다.

여름철 보리밥에 궁합이 맞는 반찬은 여러 가지가 있다. 떨어진 고무신도 제 짝이 있듯 맛없어 보이는 시커먼 보리밥도 깜냥에 비해 궁합 맞는 음식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다. 보리밥에 호박잎쌈이 우선 그러하고, 보리밥에 열무김치도 잘 어울리고, 참비름 나물을 바가지에 무쳐 보리밥 한술에 고추장 넣고 비벼 먹으면 그 맛 또한 일품이다.

이건 보리밥에 관한 일반론이다. 시금장을 먹어본 사람들은 일반론에 한 수 더 떠 보리밥 이야기가 나오면 당연히 시금장을 거론하기 마련이다. 밥 도둑놈, 시금털털 시금장.

#보리쌀 깎을 때 나오는 고운 가루가 재료

시금장은 보리 껍질 중 왕겨를 한풀 벗겨낸 다음 현맥(玄麥) 상태를 팔분도 보리쌀로 깎아낼 때 나오는 고운 가루를 재료로 해서 만든다. 고향에선 이걸 '당가리'라고 불렀다. 이 가루로 반죽을 해 도넛 같은 모양을 만들어 짚불에 구운 것을 '깨주먹이'라 했다. 구운 깨주먹이는 줄에 꿰어 부엌 벽에 걸어두고 바람과 연기로 서서히 숙성시킨다. 여름철이 오면 깨끗이 씻은 다음 절구에 찧어 가루로 만든다.

#무말랭이와 희아리 고추로 맛 더해

된장 담그는 콩을 삶은 물에 가루를 풀고 보리밥을 넣어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순수 시금장은 씹히는 맛이 없기 때문에 무말랭이와 희아리 고추를 적당하게 썰어 넣어두면 그것들이 익어 한층 더 맛을 낸다.

시금장에 관한 레시피는 이렇게 간단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기술을 연마해 온 노하우가 없으면 절대로 옳은 맛을 낼 수 없는 것이 바로 시금장이다.

어머니는 해마다 여름이 오면 시금장을 담갔다. 그때는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어서 큰 옹가지에 찬물을 가득 붓고 그 속에 시금장 독을 띄워 두었는데 다 먹을 때까지 맛이 변하지 않았다.

도시로 이사를 온 후론 짚불 굽기와 절구 찧기 등 번거로운 절차를 감당할 수가 없어 시금장은 기억 속 상자에 한갓 추억으로 갇히고 말았다.

#추억의 맛 재현해 봐도 제대로 안 돼

좀처럼 잊히지 않는 추억은 다시 한번 재현해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첫사랑이 아련하고 애틋한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다. 하루는 번개시장에 나가 깨주먹이 몇 개를 사와 내가 직접 시금장을 담그기로 했다. 기억과 상상을 종합하여 열심히 담갔지만 제대로 된 맛은 나오지 않았다. 이러다간 실종된 추억의 입맛을 영원히 찾지 못할 것 같아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았다. 의성 탑리 쪽에 답사를 갔다가 한통에 오천 원을 주고 산 시금장은 정말 맛있었고, 성주 시외버스 정류소 옆 슈퍼에서 산 것도 옛 맛을 느끼게 해주어 그걸 먹는 동안 내내 행복했던 적이 있다.

#"시금장 담가 주러 이승에 한번 오시지요"

그 후로는 제대로 된 것을 만나지 못했다. 하도 답답해서 어머님 묘소를 찾아가 농담 삼아 "시금장 담가 주러 이승에도 한번 오시지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산길 내려오기가 그렇게 어려운지 어머니는 종내 오시지 않았다. 저승에서도 먹고사는 일로 몹시 바쁘신 모양이네.

구활(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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