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칼럼] '전쟁'과 '축제'사이에서

입력 2010-06-10 10:06:08

남아공 월드컵에 출전 중인 한국 축구대표팀이 남아공 루스텐버그에 차린 베이스캠프 숙소의 이름은 헌터스 레스트(Hunter's Rest), 즉 '사냥꾼의 휴식처'이다. 숙소이름이 대표팀의 현재 상황과 맞물려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표팀이 목표로 정한 월드컵 원정 16강 진출이'거대한 산'처럼 다가올 수 있지만 이럴수록 '즐김의 미학'이 필요할 때이다. 작가 이외수는 "그대여 결코 서두르지 마라. 대어를 낚으려는 낚시꾼일수록 기다림이 친숙하고,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일수록 서둘러 신발 끈을 매지 않는다"고 했다. 국민들의 염원이 크다고 해서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이제 세상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다. 과거 한국 대표팀이 월드컵 원정에서 좋은 성적을 못낸 가장 큰 이유는 필자가 보기에는 '비장감'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즐기지를 못했다.

물론 유럽의 관점에서 보면 월드컵은 '전쟁'이다. 2000년대 초반 설문조사이기는 하지만, 유럽남성에게 "평생 꿈꾸던 이상적인 여성과의 하룻밤 섹스와 월드컵 자국경기의 TV시청 중 어느 것을 선택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80% 이상이 후자를 선택한 점으로 미루어, 그들에게 축구와 월드컵은 종교 이상의 수준이다. 영국작가 닉 혼비도 "아들의 결혼식과 잉글랜드 대표팀의 월드컵 경기가 겹친다면, 아들 결혼식은 비디오로 보겠다"고 거침없이 주장했다. 그럼에도 직접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들은 조금 다르게 접근하는 편이다. 비록 팬들은 월드컵을 전쟁으로 생각하지만, 선수들은 하나의 경기로 보고 있다. 우리의 첫 상대인 그리스의 공격수이자 소속팀인 셀틱에서는 기성용의 동료인 사마라스는 며칠 전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경기를 즐길 뿐이다, 월드컵이라고 해서 무엇이 다른가"라고 반문한 적이 있다. 정확한 지적이다. 팬들에게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기 위해선 결국 선수들이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본질적으로 축구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예술성'이 뛰어나다. 또한 신체적으로는 유연해야 한다. 즉 타고난 이들이 경기장에서 경기력이라고 하는 한편의 예술을 선보이는 것이 축구이다. 불행하게도 축구에서 노력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펠레, 마라도나, 루니, 호나우도, 메시, 차범근, 황선홍, 안정환, 박주영, 이동국 등 축구에서 골잡이 공격수들이 늦은 나이에 꽃을 피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단지 축구는 단체경기이기에 개인역량이 떨어지는 팀은 전술과 조직력 배가 등으로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개인의 역량과 팀 전술이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완벽한 경기력이 나타나는 것이 축구이다.

남미와 아프리카의 유연성은 타고난 유전자이다. 그들과 같은 현란한 개인기는 원천적으로 구현하기 힘들다. 유럽은 축구문화와 역사에서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분위기)가 있다. 그렇다고 주눅들 이유는 전혀 없다. 우리에게도 7회 연속 월드컵 출전이라는 경험과 2002년 월드컵의 성과, 유럽리그에 진출하여 선진축구를 몸으로 체득한 선수들이 있다. 팀워크도 어느 나라 보다 우수하다. 선수들도 이제 즐기기만 하면 된다.

팬들도 과도한 기대는 금물이다. 스포츠에서 승리란 절대명제에 가깝긴 하지만, 진리는 아니다. 축구라는 경기는 단순하지만, 끝을 알 수 없는 깊이가 내재되어 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창조하긴 했지만, 지속시킬 수 없었던 이유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축구문화 선진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유럽과 남미의 100년의 프로리그 역사를 한순간에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날 그 날 컨디션은 기복이 있을 수 있지만, 수준은 '영원'할 수 있는 것이 축구이다. 따라서 국내 팬들은 이번 월드컵을 통해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함과 동시에 축구 그 자체를 즐길 필요가 있다. 대표팀의 성적과 상관없이 월드컵은 그 자체로 매력적인 스포츠 이벤트이자, 지구촌의 축제이다. 지구촌에서 '전쟁'을 '축제'처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대회, 그것이 바로 월드컵이다.

전용배·동명대 체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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