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 '파리장서로 일제 부당성 역설

입력 2010-06-07 07:30:27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는 일제강점기 면우 곽종석, 심산 김창숙 등 유림을 중심으로 한 독립 의지를 잘 보여준 사례다.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는 일제강점기 면우 곽종석, 심산 김창숙 등 유림을 중심으로 한 독립 의지를 잘 보여준 사례다.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에는 유학자가 한 사람도 없다. 조선조 500년 동안 관학(官學)의 지위에 있었던 유학으로서는 치욕 그 자체였다. 이에 뜻있는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당시 1차 세계대전의 뒤처리를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던 강화회의에 일제의 강점을 고발하는 장서를 보내려는 움직임이 3·1운동 직후에 일어났다.

이 움직임은 호서와 영남 두 곳에서 시작됐는데, 영남 유림의 중심에는 심산 김창숙이 있었다. 김창숙은 유림의 독립 염원을 담은 서한을 작성해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로 하고 면우 곽종석을 찾아가 이 일의 대표를 맡아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곽종석은 대표직을 수락하고 장서의 초안도 직접 작성하는 등 적극 동참한다. 장서가 완성되자 김창숙은 곽종석을 필두로 영남 유림 120명이 서명한 이 문건을 휴대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여기서 지산 김복한을 대표로 해 호서지역 유림 17명이 서명한 또 다른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있던 임경호 일행을 만나는데, 양 진영은 두 청원서를 합치기로 하고 곽종석의 글을 최종본으로 채택했다. 이로써 유림 137명이 서명한, '파리장서'라 부르는 유림단 독립청원서가 최종적으로 확정된다.

청원운동의 갈래가 정리되자 김창숙은 파리로 가기 위해 중국 상해로 잠입한 후 거기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장서를 무사히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할 방안을 협의했다. 이 과정에서 신한청년당 대표로 뽑힌 김규식이 이미 파리에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김창숙은 주위 사람들과 협의해 자신이 직접 파리로 가는 대신 장서를 각국 언어로 번역, 김규식을 통해 강화회의에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장서는 김규식에게 성공적으로 보내져 강화회의에 전달됐고 국내에도 반입, 유포됐다. 이로 인해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어나는데, 곽종석은 74세의 나이에 대구감옥에 구금돼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병으로 출옥 후 바로 사망했다. 역사에서는 김창숙 등이 1925년부터 1927년 사이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한 일로 영남 유림에 대한 또 한 번의 체포 선풍이 불었던 사건(제2차 유림단 의거)과 대비해 '제1차 유림단 의거'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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