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강점기때 합법적인 발굴과 불법적인 도굴이 상호 작용하면서 전국의 문화재는 수도 없이 유린 약탈돼 일본으로 반출됐다. 그 수치는 대략 수십만 점으로 추정될 뿐 정확하지 않은 실정이다.
1966년 체결된 '한·일 문화재 및 문화 협력에 따른 협정'으로 일부는 돌려받았지만 핵심 문화재는 회수되지 못한 상태다. 특히 개인들이 탈취, 약탈한 석물들은 모두 사적 소유라는 명분으로 하나도 돌려받지 못했다. 1930년대 오사카에서 주기적으로 경매가 벌어졌을 때 회당 50~60점의 한국 석탑·석등·부도가 목록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일본강점기때 석물들이 얼마나 유출됐는지를 입증한다. 일본의 신사나 박물관, 미술관 등은 물론 심지어는 요리집의 정원 장식용으로 석물들이 버젓이 사용되고 있다.
신라의 동종은 종소리와 함께 그 문양이 세계적인 공예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신라의 종에 눈독을 들였다. 현재 국내에 완형의 신라 동종은 성덕대왕신종과 상원사종 두 점밖에 없는 반면 일본에는 알려진 바로도 우리보다 많은 수를 헤아리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의 반출은 일본강점기 당시에도 큰 문제가 됐다. 국보 제86호로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 전시 보존되고 있는 경천사지 10층석탑은 일본 반출과 재반입 사건을 여실히 보여준다. 1906년 통감부 시절 한국을 방문한 궁내대신 다나카는 당시 고종황제가 하사한 것으로 위장한 뒤 개성 남쪽의 부소산 기슭에 있던 이 탑을 일본의 자신의 집 정원으로 반출했다. 반출 사실이 소문나 여론이 들끓었고, 이후 곡절 끝에 1918년에 겨우 반환됐다.
뒷날 보물 61호로 지정된 불국사의 사리탑도 비슷한 곡절을 겪었다. 1909년 2대 통감으로 부임한 소네 아라스케가 초도 순시 차 경주에 들른 뒤 석굴암 안에 있던 오층석탑이 증발한 사건이 있었다. 이는 당시에도 이미 문제가 되었거니와 아마도 그의 손을 거쳐 일본으로 밀반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국사 다보탑의 4면을 장식하고 있던 4점의 돌사자 가운데 마모가 심한 한 점을 제외한 나머지 3점도 비슷한 시기에 도난돼 지금까지 행방을 알 수가 없다.
현재 보물 121호인 경주의 굴불사지 석불상 일부도 정으로 쪼개져 약탈된 것은 일제 당시 문화재 수난의 실상이 어떠하였는지를 뚜렷이 입증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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