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부부 2

입력 2010-05-29 07:42:26

부모·자식만 챙기느라 잊고 있던 내 옆의 가장 소중한 당신

생활의 발견, 작은 감동 등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이나 모임, 행사, 자랑할 일, 주위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사랑을 고백할 일이 있으시면 원고지 3~5매 정도의 분량으로 사진과 함께 보내주십시오.

글을 보내주신 분 중 한 분을 뽑아 패션 아울렛 올브랜 10만원 상품권을 보내드립니다. 많은 사연 부탁드립니다.

보내실 곳=매일신문 문화부 살아가는 이야기 담당자 앞, 또는 weekend@msnet.co.kr

지난주 당첨자=배상연(대구 달서구 이곡동)

★다음 주 글감은 '이사 가던 날'입니다

♥ 전근 다니는 동안 부모님 모셔준 아내에 감사

내 나이 21세, 아내 나이 19세에 우리는 안동에서 결혼하였다. 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나는 동서 사방으로 전근을 다니며 고향을 떠나 돌아다녀야 했다. 하지만 아내는 안동의 집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혼자 있었고 나는 1주일이나 2주일에 한 번씩 집을 찾았다. 아이들이 나고 자라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가면서 아이들도 전부 대구에 와서 저희들끼리 자취를 하고 학교를 다녔고 아내는 여전히 안동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있었다. 그런 생활을 30년을 하다 아버님이 별세하셨고 어머니를 모시고 대구로 내려와 한 가정을 이루고 3년이 지나자 어머니마저 별세하셨다. 우리 부부는 어머니 영전에서 한없이 울었다. 아버지 옆에 산소를 쓰고 묘비를 세웠다.

결혼하고 부모님을 모시며 온 정성을 다한 우리 부부는 30여년을 별거생활 끝에 55세에 단란한 부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젊어서 힘써 부모님을 모시고 나이 들어 함께 지난날을 추억하며 살고 있으니 우리 부부는 행복하다.

비록 몸이 하나뿐이라 아내는 아이들 한 번 찾아가지 못했고 내가 한 달에 한 번 아이들을 찾아 학비와 용돈을 주었을 뿐인데 아이들도 다 잘 자랐다. 아마도 이 말년에 누리는 행복은 우리 부부가 정성껏 부모님을 모신 복을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묵묵히 감당해 준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박덕근(대구 북구 산격동)

♥재산 다 날리고 고생할 때도 믿음만은 변치 않아

1980년대 은행원과 교사로 만나 김장 30번을 하다 보니 벌써 결혼 30주년이 됩니다. 요즘 소위 언론 등에서 늘 나오는 베이비붐 세대의 일원입니다. 홀어머님에 시동생, 시누이. 누구나 다 겪는 일이지만 직장 생활만 하다 정말 밥 한 번 해보지 않고 용감하게, 그것도 장손댁에 대장 며느리하겠다고 왔습니다. 정말 하늘이 노랗기만 했고 매년 기제사며 명절에 세상모르고 살았습니다. 진작 친정어머니께 좀 배워 올 걸 하며 뒤늦은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솜씨 좋으신 시어머님을 보고 따라한 덕분에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 같습니다.

큰아이를 낳고 기뻤고 작은아이를 낳고는 더 기뻤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작은아이가 돌도 되기 전 전세금을 경매로 다 날리기도 했습니다. 작은아이가 가끔씩 "엄마, 왜 나는 유치원 사진이 없어?"라고 할 때면 너무나 미안해서 돌아서 운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것도 모두 다 삶의 과정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재산을 다 날리고 일곱 식구 살 집도, 잘 방도 없었을 때는 정말 막막했습니다. 친정아버지에게 도움을 얻기 위해 찾아갔지만 보증은 부모 자식 간에도 서는 것이 아니라며 당신도 며느리가 둘씩이나 있으니 마음대로 할 수 없노라고 거절하셨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친정아버지 덕분에 더 강하게, 악착같이 홀로 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늘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내가 은행원 시절 모셨던 지점장님을 찾아 사정 이야기를 드렸더니 보증 없이 선뜻 전세금을 대출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그분의 배려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살자고 남편과 다짐했고 아이들이 어린 시절이라 아끼며 성실하게 살다 보니 지금의 이런 날이 주어진 것 같습니다. 늘 반듯하고 바른 길을 가시며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시고 항상 격려해 주시는 남편이기에 아이들과 저는 늘 당신을 존경하며 사랑합니다.

귀신 잡는 해병 장교 출신인 남편은 아들이 해병대에 지원해서 들어간다고 하자 가장 기뻐하며 활짝 웃었습니다. 그때 처음 그렇게 기뻐하며 웃는 모습을 본 것 같습니다. 부부는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같이 웃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생활하다 보면 오누이처럼 닮아 가는 것 같습니다. 항상 건강하며 지금처럼 살고 싶습니다. 아내 김경희~

김경희(대구 수성구 신매동)

♥경제적 여유 없는데도 공부하고 싶다 하자 쉽게 허락

성철 스님이 "상대에게 덕을 보려고 생각하지 말고 덕을 보이려고 생각하고 결혼하면 후회 없는 결혼생활이 된다"라고 말씀하셨듯이 남편은 나에게 덕을 보이려고 만난 사람인 듯하다. 세상을 한층 밝게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준 당신께 이번 부부의 날을 맞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1999년 큰아들이 병역의무를 마치고 복학하고 작은아들의 입학과, 거기에 나까지, 4인 가족 중 세 명이 대학생으로 생활해 남편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 1992년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근무력증으로 가슴을 여는 수술을 받고 10년간 외래 치료를 다녔으니 당시만 해도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여유롭지 못했지만 취미가 공부라는 걸 알고, 본인의 건강이 혹시라도 회복되지 않으면 내게 생계를 열어 준다고 공부를 허락해 준 당신.

살면서 내 마음이 들떠 있으면 부정적으로 될 수도 있다고 가라앉히고 처져 있을 땐 위로의 말로 끌어올려주며 내 부족한 면을 채워주고 앞만 보며 성실히 살아온 당신. 이젠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며 새들의 노랫소리 들으면서 여유롭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내가 보답하고 싶다.

항상 "남에게 한걸음 양보하고 약간씩 손해 보며 살자"며 묵직하고 깊이 있는 조언을 해주는 든든한 사람!

두꺼운 입술, 무거운 입으로 사랑을 말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행동으로 보여주는 남편 김학구씨. 하늘과 땅을 볼 수 있는 그날까지 내 생명 이상으로 사랑하리라!

권오심(대구 남구 대명3동)

♥ 장모님 반대에도 8남매 장남에 시집와줘 고마워

28세 8남매 장남. 농촌 노총각에 가진 재산 없는 나에게 당신은 구세주이며 오늘날 요만큼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한 장본인입니다. 할머니, 부모님, 남동생 넷, 여동생 하나, 총 아홉 식구의 맏며느리로 보내는 것이 못내 걱정돼 반대하셨던 장인 장모님의 심중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대구에 정착하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가난의 굴레는 쉽게 벗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를 악물고 열심히 산 46년의 세월 속에 동생들도 각자의 짝을 찾았고 온갖 궂은 장사를 마다하지 않고 고생을 하면서도 한마디 불평 없었던 당신은 슬하의 3남매도 훌륭하게 키워 독립시켰습니다. 이곳에 정착한 지 34년, 비록 협소한 상가 주택이긴 하지만 우리 소유의 공간에서 장사를 하며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당신은 분명 여장부입니다. 우리 형제자매의 우애를 이어주는 촉매 역할을 하는 당신을 다른 사람들은 평범한 늙은이로 보겠지만 나에게는 보석입니다. 잎으로 살면서 당신의 은혜를 서서히 갚아 나가겠습니다. 사랑하는 당신의 남편.

윤육한(대구 수성구 범어4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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