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익어 푸른 홍옥, 한끼 반찬으로도 거뜬
여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향의 금호강변이다. 지금은 층수 높은 아파트가 줄지어 늘어서 있지만 그때는 강변에 능금밭밖에 없었다. 봄이 오면 능금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맨 먼저 '이와이'(축이란 사과의 일본식 이름)를 수확하고 그 다음에 빛 밝은 뙤약볕에 붉은색으로 익어가는 홍옥을 땄다.
그러다 가을로 접어들어 겨울 과일의 왕자인 국광을 추수해 창고에 저장하고 나면 일년 내내 농사일에 시달리던 농부들은 기지개를 켜면서 겨울 속으로 들어가 피곤을 접었다.
다 익어도 푸른 색깔인 '이와이'를 한입 베어먹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고, 홍옥은 암팡지게 생긴 꼴값에 색깔값까지 하느라 정말 달고 새콤하다. 그러나 국광은 맛이 깊고 점잖은 데다 이듬해 봄까지 저장할 수 있기 때문에 능금 중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시속과 세태가 바뀌어 옛날 즐겨 먹던 홍옥과 국광 같은 능금은 자취 없이 사라져 시장 구석구석을 뒤져도 찾을 수가 없다. 요즘은 아오리, 홍로, 부사(富士)라는 신품종들이 판을 치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도 어릴 적 입맛을 갚아 주지는 못한다.
◆오래 저장할 수 있는 '국광' 최고 대접
언젠가 '능금밭에 얽힌 추억'이란 글을 쓰면서 홍옥을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삼복더위와 함께 빠알갛게 익어 가는 홍옥(紅玉). 그 정열적인 붉은 의상 속에 은밀하게 감춰져 있는 희디흰 속살, 그리고 그 맛이란 '새콤함'이란 하나의 낱말로는 표현이 오히려 모자라는 저 뭐랄까 진한 정사(情事) 끝에 오는 전율 같은 것.' 표현이 좀 야하기는 해도 홍옥이란 여름 여왕에게 바치는 찬사는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장마철이 오면 능금밭은 큰 피해를 입는다. 홍옥이 한창 익어가는 계절에 불어닥치는 비바람은 제법 실하게 달린 굵은 능금까지 떨어뜨려 '흠다리 능금'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때 가장 신이 나는 이들은 우리처럼 능금밭이 없는 사람들이다. 능금밭마다 일손이 부족하여 떨어진 능금을 줍는 품을 한나절만 팔아도 들기 무거울 정도로 능금을 얻어올 수가 있었다. 난전에 나온 능금들은 엄청나게 싸 한 광주리에 요즘 돈으로 천원밖에 하지 않았다. 비바람이 멎고 날이 개면 집집마다 '흠다리 능금'을 많이 먹고 능금 똥을 싸느라 변소 들락거리느라 바빴다.
◆남의 능금밭 제집처럼 드나들어
장마가 끝나면 홍옥값은 다락같이 오른다. 밭주인들의 탱자나무 울타리 단속도 한결 심해진다. 개구멍으로 몰래 들어가 능금 몇 알 따먹는 일은 큰 죄가 아니었으므로 또래들은 멱을 감거나 피라미를 잡기 위해 강으로 나갈 적마다 심심찮게 남의 능금밭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개구멍이 막히면 비상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대나무 낚싯대를 반으로 자른 끄트머리에 대못을 박아 둘러메고 나간다. 울타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능금 알들은 겨냥하여 내리찍는 대나무 장대를 피할 재간이 없다. 더러는 주인에게 들켜 혼날 때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파출소로 끌려가는 일은 없다. "야, 이놈들!"하는 고함소리가 들리면 시치미 뚝 떼고 비실비실 피하면 그만이다.
◆새콤한 홍옥 냉채 먹으며 키 컸는지도…
어머니는 붉게 익은 것보다 덜 익은 푸른 색깔의 홍옥을 좋아하셨다. 알고 보니 덜 익어 새그랍기(신맛나기의 고향 사투리) 짝이 없는 푸른 것은 채를 쳐 냉채를 만들면 한끼 반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홍옥뿐 아니라 붉은 속살을 먹고 남은 수박 껍질의 흰 살점도 잘게 채쳐 수박 냉채를 만들어 먹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군데군데 모깃불이 지펴져 있는 여름 저녁 마당. 그 추억의 멍석에 앉아 홍옥 냉채가 푸짐한 보리밥 한 그릇 먹고 싶다. 사실 나는 이 배 식초보다 훨씬 더 시고 새콤한 홍옥 냉채를 먹으면서 키가 자랐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나의 키는 1m85㎝다.
구활(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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