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 지휘관 불화·안동교 조기폭파 겹쳐, 강물 피로 물들어
1950년 7월 29일.
강릉에서 재편성된 북한공산군 8사단은 평창·제천·단양을 거쳐 같은 방향으로 철수 중이던 아군 8사단을 추격해 수도사단 18연대의 방위지역인 예천으로 침공해 왔다. 공교롭게도 피아간에 같은 8사단끼리 쫓고 쫓기는 공방전을 전개한 데다 아군 수도사단의 18연대 정면에서 공세를 취해온 적과 맞닥뜨린 것이다.
이에 앞서 영주를 점령한 적 12사단은 내친김에 안동 방면으로 밀고 들어가 예천의 8사단과 합동으로 양면작전을 기도하고 있었다. 적의 목표는 낙동강 상류를 도하해 의성을 거쳐 대구의 배후도시인 영천을 공략하는 것이다. 낙동강 교두보의 전면전을 예고하는 전초전과 다름이 없었다. 이 무렵 작전지도를 위해 안동 북방까지 전선시찰을 나왔던 인민군 총참모장(합참의장) 강건(姜健) 대장이 아군의 지뢰를 밟아 그 자리서 즉사하고 만다. 적 지휘관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개전 초부터 줄곧 동해안을 따라 공격 전선을 유지해온 적 5사단 주력이 강릉~삼척~울진~영덕으로 진공해 왔고 삼척 해안에서 태백산으로 침투해온 766군 유격부대는 영양 일월산을 거쳐 청송 진보까지 진출했다. 게릴라 전술의 권위자로 알려진 오진우 총좌(후일 인민무력부장 역임)가 지휘하는 766군 유격대는 남로당 공비들을 흡수한 혼성 유격부대로 5사단의 일부 전투 병력을 지원 받아 안동을 우회해서 포위할 계획이었다.
영주와 안동의 임계선에서 지연 작전을 펴던 아군 8사단은 안동 북방 옹천에 지휘소를 두고 휘하 21연대를 동북방의 349고지에, 16연대는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 남방 능선에, 10연대는 내성천 좌측 482고지에 각각 포진, 적 2개 사단의 안동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다. 근접해 있던 수도사단의 1연대도 8사단 10연대의 좌측 조운산에 포진해 적의 내성천 도하작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7월 31일 오후 늦게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는 미 8군 사령부에서 '낙동강 교두보의 전선 정비를 위해 8월 1일 새벽 5시까지 수도사단과 8사단을 안동에서 철수시키라'는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설상가상이었다. 접적(接敵)이 없는 상황에서도 2개 사단의 병력과 장비를 하룻밤 사이에 이동하기가 불가능한데 한창 공방전을 펴고 있는 최전선의 전투 부대를 빼낸다는 것은 전선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무모한 짓이었다. 특히 아군의 야간 후퇴작전은 미 공군의 제공권이 무력해지는 야간에만 사생결단하고 공세를 취하는 적에게 기름을 안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미 8군에서 안동 철수작전을 급히 서두른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미 제24·25사단과 제1기병사단이 낙동강 주저항선에 배치되기 시작했으나 전반적인 전황은 7월 25일부터 위기 상황에 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금강선(線)과 소백산맥을 돌파한 적의 주력이 낙동강 교두보의 한·미 연합군 주저항선으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해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었다.
이 무렵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사실상 대구 사수가 어렵다고 판단, 만일의 경우 낙동강 교두보를 포기하고 대구에 있는 베이스캠프를 부산으로 철수할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 참모장 아먼드 중장에게 "대구를 포기하고 부산으로 철수하겠다"고 건의하기에 이른다. 이 보고를 받은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아먼드 참모장과 함께 7월 27일 대구로 날아와 워커 장군을 설득하고 대구 사수를 결심한다. 왜냐하면 대구 사수를 포기할 경우 낙동강 전선에서 적의 주력을 묶어놓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다는 맥아더 원수의 원대한 작전계획이 자칫 수포로 돌아가고 한국 전쟁의 승산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국군 8사단은 내성천 일대에서 안동을 사수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펴고 있었으나 엄청난 적의 화력에 견디다 못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혼란에 빠진 상황이었다. 적이 예천에서 안동으로 밀고 들어와 낙동강을 단숨에 도하하려는 의도에서 파상적인 공세를 취해오고 있었고 수도사단이 8사단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뛰어들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그러나 미 8군의 작전명령대로 급히 서둘러 후퇴할 만큼 위급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 김석원 장군을 비롯한 한국군 지휘관들의 판단이었다. 안동을 사수하겠다는 국군의 결사항전 태세는 강렬했다. 이런 가운데 "수도사단은 엄호사단으로, 8사단은 선발 철수사단으로 후퇴하라"라는 제1군단 사령부의 작명이 떨어졌다. 이 역시 사단 전체의 후퇴작전은 예하부대의 조직적인 엄호하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략상 원칙을 깬 실수였다.
이 때문에 8월 1일 새벽녘에서야 대대 단위까지 작명이 전달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고 중·소대에는 제대로 작명을 전달하지 않아 근접 교전 중이던 일선 중·소대가 고립되기도 했다. 16연대의 경우 낙동강 이남의 철수지역까지 도달한 병력이 260명에 불과했다. 대부분 실종되거나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도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후퇴 명령을 받고도 자신의 전략과 배치된다며 "내가 있는 한 이 이상 후퇴는 없다"며 '우리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는 벽보까지 써붙여 놓고 안동 시민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게다가 전선 후방에 헌병 독전대를 배치, "후퇴하면 사살한다"고 장병들을 다그쳤으나 결국 지휘체계 혼란으로 안동이 함락되고 시가지가 불길에 휩싸이고 만다.
김석원 장군은 안동 시내에 적의 박격포탄이 비오듯 쏟아지고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는데도 "안동시민들에 대한 체면이 있는데 나는 절대 후퇴할 수 없다"며 "장수는 싸우다 죽어야 한다"고 한사코 버텼다. 그 와중에 옹천지구에서 적 12사단의 주력과 격전을 치르던 수도사단 1연대는 50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잔여 병력 2개 대대가 안동 시내로 후퇴했다.
그러나 안동교가 이미 폭파돼 4km나 떨어진 상류로 올라가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장맛비로 상류에도 강물이 불어나 적의 공격에 쫓기며 목까지 차오르는 강을 건너다 결국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안동 철수작전의 실패는 적전 지휘관들의 불화와 안동교의 조기 폭파, 미 8군의 급속한 후퇴 명령과 이에 따르는 각 전투부대 간의 횡적 연락두절 등 복합적인 문제가 겹친 결과였다.
특히 안동교 조기 폭파는 8월 1일 날이 샐 무렵 제1군단 참모장 최덕신 대령의 명령에 의해 군단 공병대가 단행했으나 최 대령은 8사단장 이성가 대령의 승낙을 받아 폭파했다고 주장하고 이 대령은 잔존 병력이 철수한 다음에 폭파하라고 건의했다며 서로 상반된 주장을 내놓고 있다. 마치 6월 28일 새벽 한강교 폭파사건의 경위와 흡사했다.
아군 8사단 10연대는 그나마도 조금 일찍 철수하는 바람에 인명 피해가 적었으나 21연대, 16연대와 수도사단 1연대 등은 적의 공세에 쫓기며 안동교가 폭파된 이후 분산 철수하기에 이른다. 이 바람에 수천명의 병력이 등짝에 쏟아지는 적탄을 피해 강물로 뛰어들었다가 급류에 휩쓸린 데다 적의 집중사격으로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아수라장을 이루었고 적의 포로가 된 장병만도 300여명에 달했다.
이용우(언론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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