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대신 육아휴직 '전업주부' 들어앉은 이 남자

입력 2010-05-13 07:33:08

꿀맛인 줄만 알았더니…"男은 몰랐네"

신동진씨는 1년간 육아휴직을 내고 육아와 함께 집안 살림을 도맡아하고 있다.
신동진씨는 1년간 육아휴직을 내고 육아와 함께 집안 살림을 도맡아하고 있다.

집안일과 육아는 반드시 여성의 몫이어야 할까.

대구종합고용지원센터에 따르면 대구지역 육아휴직 신청자 가운데 여성의 수는 2007년 여성 579명, 2008년 829명, 2009년 959명으로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하지만 육아휴직을 신청하는 대구 남성의 수는 지극히 미미하다. 2007년과 2008년에는 9명, 2009년엔 고작 11명의 남성이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이는 전국의 2, 3%에 불과한 수준이다.

대구 남성의 육아휴직 신청이 저조한 현실은 유난한 보수성과 가부장적 사고가 강한 대구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육아휴직을 내고 네식구를 뒷바라지하며 집안일을 도맡아하는 아빠가 있다. 전업주부 생활을 하고 있는 한 남자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신동진(36'대구 수성구 시지동)씨의 아침은 오전 7시, 출근하는 아내의 아침식사를 차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침에 유독 입맛 없어 하는 아내를 위해 주로 죽이나 수프를 준비한다.

그 후 아이들을 깨워 세하(7), 다안(6)이를 어린이집으로 보낸 뒤 막내 차람(3)이의 아침밥을 먹인다. 설거지를 하고 집안 청소와 빨래를 모두 마친 시간은 오전 10시. 16개월 된 차람이를 재우고 나면 비로소 하루 중 유일한 자신만의 휴식시간이 생긴다.

"아이가 자는 두 시간 동안 책도 읽고 인터넷 검색, 게임을 하면서 놀아요. 하루 중 저 혼자 놀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죠."

#자유시간 하루 겨우 두시간

아이가 낮잠에서 깨면 간식을 챙겨 먹이고 동네 산책을 나간다. 오후 4시 아이가 다시 낮잠을 자면 본격적으로 저녁 식사 준비를 시작한다. 아내 이재선(30)씨가 퇴근할 즈음이면 어린이집에 갔던 아이들이 돌아오고 온 식구가 함께 아빠가 준비한 저녁 식탁에 둘러앉는다. 신씨는 네식구의 뒷바라지를 도맡아하는 전업주부다.

신씨의 직업은 고등학교 교사. 3월부터 1년간 육아휴직을 냈다. 교사로서의 생활은 당분간 접어두고 전업주부 생활에 몰두하기로 한 것.

"교사인 아내가 3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육아휴직을 했어요. 세 아이를 위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좀 미안했죠. 아내는 교사가 참 적성에 맞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육아휴직을 냈어요."

막내가 아직 어려 내린 결정이지만 세 아이를 돌보고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와 빨래를 혼자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특히 모든 식구들이 집에 있는 주말은 일이 많아 힘들다.

처음 살림을 시작한 3월, 요리를 해본 적이 없는 그는 수첩 가득 빼곡하게 식단을 적어 내려갔다. 그가 참고할 수 있는 자료는 요리책뿐. 그래서인지 매일같이 요리책에 나오는 '굴 깐풍기''브로콜리 순두부죽' '조기양념찜' '불낙전골' 등 특별 요리를 해야 했다. 이제는 요리에도 제법 익숙해져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반찬을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남편이 차려준 밥을 먹으며 아내 이씨는 "요즘 정말 행복해" "여보, 너무 맛있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아이들도 신씨가 만든 요리를 맛있어 한다. 가끔은 요리를 해 이웃들을 초대하기도 한다.

남자인 그가 육아휴직을 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어땠을까. 직장 동료들은 은근히 우려하는 분위기였지만 네 명의 누나들은 오히려 그를 응원했다. 2남4녀 중 막내인 그에게 누나들은 '시대가 달라졌으니 너도 육아휴직을 해야 한다'며 그를 독려했고, 누나들의 성화 덕분인지 어머니 역시 "네가 애를 잘 볼 수 있겠냐"며 걱정하셨지만 별다른 반대는 하지 않으셨다.

#집안일 의미 크지만 삶에 의미는?

아내 이씨는 남편의 외조 덕분에 편하게 사회생활에 몰두할 수 있다. "남편이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 집안일을 완벽하게 해내요.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칭찬해주는 것이 전부지만 남편이 참 고맙죠."

하지만 신씨는 주부로서의 생활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 그는 우리나라 제3의 성(性) '아줌마'에 대해서 강한 동질감을 느끼게 됐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아줌마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살림을 맡은 후 일상이 무기력해지고 사소한 일에 짜증이 나요. 평소 같으면 화낼 만한 일이 아닌데도 화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해요. 예를 들면 양말을 뒤집어 벗어놓는 것 같은거죠. 바가지 긁는 아내들의 모습이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얼마 전 대형마트를 갔다가 '반짝 세일'이란 홍보에 그는 아줌마들 틈새에서 긴 줄을 섰다. 평소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시간도 아깝고 꼭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평소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죠. 그런데 어느새 저도 모르게 줄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어요. 단돈 500원의 가격 차이에 민감해진거죠."

온전히 자신만의 책임으로 주어진 집안일도 버겁다. 집안일은 가족을 위한다는 의미있는 일이긴 하지만 자부심이나 '삶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전업주부 생활을 하자 비로소 '대한민국 아줌마'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뽀글 파마 차림으로 식당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수다를 떠는 아줌마들, 인터넷 쇼핑으로 구입과 환불을 반복했던 아내의 모습이 말이다.

#"아내들은 칭찬받아 마땅"

"저야 1년으로 기간이 정해져 있고 아내가 계속 칭찬해주니 할 만하지만 일반 주부들은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적절한 보상과 피드백이 없으니 얼마나 힘들까 싶어요. 주부들이 끊임없이 취미생활이나 일을 찾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는 '살림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기 위해 방 하나를 자신만의 '동굴'로 만들었다. 아내와 아이들의 저녁을 차려주고 설거지를 끝낸 후엔 동굴 속에서 휴식 시간을 갖는다. 처음 집안일을 시작한 한 달간은 너무 지치고 힘들었지만 이젠 일도 제법 손에 익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무조건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집안일에서 '일탈'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는 '아줌마는 사회와 가족이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아줌마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남자 전업주부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는 남편들에게 한마디 조언을 했다.

"남편들이 아내를 칭찬해주는 것이 아주 중요해요.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늘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면 훨씬 덜 힘들 것 같아요. 가끔씩 주부의 자유를 눈감아주는 것은 필수죠."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igsu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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