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국방개혁

입력 2010-05-12 11:20:14

2차 대전의 초반 승부를 가른 것은 전차, 더 정확히는 전차 운용전술이었다. 독일은 항공기의 지원을 받는 기계화사단이 적 방어선을 돌파해 적 후방 깊숙히 진격하면 뒤따라온 보병부대가 뒷정리를 맡는 '종심(縱心) 돌파' 전술로 연합군을 마음껏 유린했다. 독일 기계화부대의 진격 속도가 얼마나 빨랐던지 독일군 전차를 아군 전차로 착각한 프랑스 장교가 독일군에게 진격방향을 수정해주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시점에 이곳에 독일군 전차가 있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술의 원조는 독일이 아니라 영국이었다. 영국은 1927년 독일이 전차 1대도 없을 때 시범 기계화사단을 만들 만큼 선구적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개발된 전차는 대부분 정찰을 위한 경량 모델이었고 그마저 보병사단에 분산 배치, 독일이 그 위력을 실증했던 전차의 집단화를 포기했다. 또 기갑전 교리 개발과 전술훈련을 중단했고 공군과의 합동 훈련도 실시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데는 "항공기와 전차는 병사들과 말의 액세서리에 불과하다"고 한 육군 원수 더글러스 헤이그처럼 군 수뇌부의 멍청한 군사적 마인드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프랑스도 다르지 않았다. 1930년대에 프랑스 전차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했다. '샤르 B1'은 독일 포탄이 장갑에 맞으면 튕겨나올 정도였다. '소뮤아 S35' 역시 속도, 안전성, 명중률에서 다른 어느 전차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전차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서는 감이 없었다. 영국처럼 보병과 기병 사단에 분산 배치했다. 직업군대를 반동 음모의 소굴로 여겼던 좌익 인민전선 정부의 근거 없는 두려움까지 가세하면서 군 지휘부는 군의 기계화에 관심을 껐다.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수였던 샤를르 드골은 기계화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메아리 없는 외침이었다. 1938~1939년에야 비로소 6개의 기계화사단을 만들었지만 너무 늦었고 규모도 너무 작았다.('전쟁이 만든 신세계' 맥스 부트) 프랑스군 지휘부의 마인드도 멍청하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천안함 침몰을 계기로 정부가 국가안보시스템의 총체적 재점검에 착수했다. 이를 통해 여러 방면에서 국방개혁이 추진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군 지휘부의 마인드 변화이다. 지휘부가 경직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전사(戰史)는 잘 보여주고 있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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