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삶을 여행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상의 삶을 여행이라 여기기는 쉽지 않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설핏 들다가도 이내 삶이 무슨 여행이야, 만약 여행이라 하더라도 고행이야라고 되뇔 것이다. 여행은 자유롭고 즐겁고 흥미진진하고 의무가 없다. 삶은 의무투성이고 힘든 순간이 더 많으며 언제나 똑같다.
그래도 삶은 여행이 맞다. 육하원칙하에 문장을 만들어 보자. 일단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에 해당하는 것을 넣어보는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당신을'을 넣어보자. 소리 내어 말해보자. '나는 지금 여기서 당신을 여행하고 있어.'
'당신을'이라는 말 덕분에 삶은 만남의 집합체라는 생각이 들고 만남은 여행이라는 단어로 연결된다. 이제까지는 집을 나선 여행 중의 만남을 더 즐거워하고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 '당신'이라는 말이 '지금, 여기서'와 연결되자 마음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늘 당신을 보고 있었지만 지금과 여기를 잊고 허투루 보고 있었으므로 미안해진다. 마음이 순해진다. 만약 '당신'에 해당하는 사람이 곁에 없다면 '당신'을 '나'로 바꾸어도 괜찮다. 더 훌륭하다. 나를 여행하고 나서야 당신을 제대로 여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든 이국의 길 위에서든.
이 문장으로도 삶이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첨가하면 좋은 것이 있다.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말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당신을 여행하는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라는 마음은 그럴지도 몰라, 로 옮겨간다. 비장한 느낌이 들며 사뭇 진지해진다. '이 봄은 처음이자 마지막 봄이지. 내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은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니야. 나도 어제의 내가 아니지 않은가.' 걸핏하면 잊고 있던 삶과 생명의 유한성에 접속된다. 이 말은 과학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냥 상식적으로, 옳다. 여행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진실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육하원칙에서 '어떻게'와 '왜'가 빠졌다. 하지만 그 두 부분으로 인해 각기 다른 빛깔의 여행을 할 터이니 상관이 없다. 이 한 문장의 처방전은 자주 유용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지금이 힘든 시간일 때, 여기가 지겨워졌을 때, 당신이 미울 때, 무엇보다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떠나고 싶을 때, 그런데 지갑이 비어 있을 때.
추 선 희 번역가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