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중에 병풍두르고 묘지 옮기기도
경북 안동 서후에서는 1920년대 당시 웃지 못할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1921년 태장리의 김모씨가 생을 마치자 '묘지단속 규칙'에 따라 공동묘지에 매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 공동묘지는 태장에서 면소재지로 넘어가는 고개인 당고개에 있었는데, 이곳에 매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뒤 007작전을 하듯 일본 순사들의 눈을 피해 밤에 이장을 했다.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공동묘지에서 파묘를 하고 한 팀은 이장할 곳의 묘역을 만들고 있었다. 혹시 불빛이 새어나갈까봐 병풍을 두르고 무명 솜이불을 덮어놓고 일을 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사람들이 호롱불의 그을음으로 인해 까맣게 변했다고 한다.
1929년 학봉 종택에서는 15대 종손의 조모님이 돌아가셨다. 절대로 공동묘지에는 묘를 쓸 수 없다는 조부님의 엄명에 따라 종가의 건너편에 있는 서산 김흥락(金興洛·1827-1899) 선생의 묘가 있는 옆 능선에 장사를 지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벌금형이 떨어졌지만 조부는 벌을 받더라도 벌금을 내지 않기로 했다. 학봉 종택의 전통으로 보아 벌금을 내지 않을 것을 안 안동경찰서장이 대납했다는 일화가 있다.
1930년대 충남 부여에서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매우 조심해야 했다. 당시 일제는 2대 봉사(奉祀)로 규정했으니 그 이상의 제사를 지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낮에 일상 음식하듯 제사 음식을 만들어 준비를 해 둔다. 초저녁에 일찌감치 불을 끄고 자는 척하다가 제사 시간이 되면 촛불의 빛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문에 담요를 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사 지내는 맘이 얼마나 조마조마했을까.
중앙선 철도 공사를 할 때의 일이다. 안동 와룡에 있는 학봉 선생의 묘소 바로 앞을 지나가도록 설계되었으나 결과는 우회하도록 공사를 했다. 이에 대해 유명한 종가의 사정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회유하려는 정책을 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서산 선생의 손자 김용환은 파락호를 가장해 가산과 함께 돈을 모아 독립군의 군자금을 공급하고 있었다. 결국 회유정책은 실패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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