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공간부터 간첩 색출에 명성을 떨쳐온 대공검사 오제도(吳制度)는 북한공산집단의 저격대상 1호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는 긴박한 전황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피란길에 오르며 긴 한숨과 함께 혼잣말처럼 넋두리했다.
"성시백의 뿌리가 그토록 깊었단 말인가?"
그는 불현듯 지난 5월 15일 자신이 직접 검거한 거물 남파간첩 성시백(成始佰)을 떠올렸다. 성시백은 이미 검거된 거물간첩 이주하·김삼룡·김수임의 머리 위에 올라 있는 김일성이 직접 남파한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190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그는 25세 되던 해인 1930년 상해로 망명해 국제공산당에 투신한 뒤 자칭 임시정부 요인으로 행세해온 골수 공산주의자였다. 1947년 5월 김일성의 특명을 받고 서울에 잠입한 그는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라는 비트(비밀 아지트)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간첩활동에 나선다.
그는 처음 남북 교역에 뛰어들어 북한의 명태와 카바이트를 남한 간상(奸商)들에게 독점 공급하면서 1억원이 넘는 공작 자금으로 대남 정보를 수집하고 정·관계 및 군부에 조직적으로 침투해 집요한 정치 공작을 편다. 이후 칭다오(靑島)에 본부를 둔 북로당의 조선상사를 근거지로 중공과의 밀무역을 통해서도 3만8천800달러의 공작 자금을 확보한다. 그 당시로서는 거액이었다.
그는 이 자금을 바탕으로 '조선중앙일보', '우리신문' 등 합법적으로 언론사를 경영하며 5·10 총선에 개입, 입후보자들에게 선거자금을 지원하고 군 수뇌부의 동향과 정치·경제·문화 등 각 분야의 기밀을 수집하여 단파 무전으로 김일성에게 보고해 왔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경영하는 좌파 매체를 통해 북한공산집단의 기만 정책을 암암리에 선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각계각층에 뿌리내린 그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했다.
이후 터지기 시작한 국회 프락치사건을 비롯해 38선을 방어하고 있던 표무원·강태무 소령의 국군 2개 대대 월북사건, 6·25 직전의 군 수뇌부 이동과 비상경계령 해제, 농번기 휴가·외출·외박 실시 등 국군의 방어태세와 작전계획을 오도한 것도 모두 그의 공작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오 검사에게 압수된 그의 비밀문서를 판독한 결과 국방부·육군본부·해군통제부사령부 등 군 수뇌부는 물론 미 대사관의 한국인 직원과 연결된 공작요원이 자그마치 112명에 달하는 등 실로 어마어마한 조직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조직에는 신성모 국방장관의 아들 신모 소령도 연루돼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군 수뇌부에서는 군 관련 수사를 외면한 채 이 같은 여론을 덮기에만 급급했다.
검찰은 이에 앞서 3월 27일 남로당의 거물 이주하를 검거한 데 이어 28일에는 김삼룡을 검거했고 여간첩 김수임마저 검거해 한시름을 놓던 차에 성시백이라는 또 다른 거물간첩이 드러나자 여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거물 간첩들은 6·25가 터지자 모두 총살형을 당했지만 검찰은 대한민국의 요직에까지 뿌리박힌 배후를 완전히 밝혀내지 못한 채 전화(戰火)에 휩쓸리고 만다.
오제도 검사는 그것을 안타까워 했다. 오 검사는 6·25가 터지자 조사 과정에 있던 성시백을 이송하자고 주장했으나 군 수사기관에서 서둘러 처형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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