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채썰어 넣고 지은 밥…겨울 버티는 대책
무는 양식이었다. 곡식 다음으로 허기를 면하게 해 준 위대한 식품이었다. 생활의 3요소가 의식주라면 식의 3가지 기본은 밥·된장·김치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쌀과 콩 그리고 무와 배추만 있으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
최근 '북한의 실상'이란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여인이 부석부석한 얼굴로 시장 입구에 서 있었다. 여인의 가슴팍에는 '딸을 백원에 팝니다'란 글귀가 씌어져 있었다. 딸아이의 굶어 죽는 모습을 보느니 양식이 다소 넉넉한 집에 팔아 목숨은 건져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런 결단을 내린 것 같았다. 딸이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떠나게 되자 그 여인은 받은 돈 백원으로 밀가루 빵을 사 아이의 입에 밀어 넣어 주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십분짜리인 이 동영상을 보고 있으니 느닷없이 고향의 밥상이 떠올랐다. 나를 비롯한 우리 오남매도 어머니가 없었더라면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을까. 그러자 울며 끌려가는 그 딸아이의 얼굴에 어릴 적 내 얼굴이 오버랩되면서 그 아이의 슬픔과 그 여인의 비통함이 내 가슴속으로 전이되어 뭉글뭉글한 붉은 각혈덩이를 쏟아내는 것 같았다.
#농사 소출은 가족의 식량이 최우선
겨울철 우리집의 슬로건은 '겨울을 이기자'였다. 어머니 손으로 이뤄지는 모든 농사는 겨울을 대비하는 필사의 투쟁이었다. 농사의 소출은 '공구'(空口'식구의 다른 말)들의 식량이 최우선이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곡식을 내다 파는 일은 없었다. 모르긴 해도 '아이를 백원에 팔아야' 하는 기아의 종점에 서지는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겨울을 이겨낼 작전은 봄부터 시작된다. 밭으로 변한 너른 앞마당에서 캐낸 감자는 재를 뿌려 갈무리하고 알토란을 비롯한 뿌리채소는 그것대로 한곳에 모아둔다. 그리고 덜 익은 호박은 호박오가리로, 고추와 가지는 튀각으로, 콩잎과 팥잎 등 온갖 잎채소는 된장과 고추장 독에 쟁여둔다. 일을 마친 저녁답에 허리를 펴시면서 "우째, 이만 하면 겨울을 나겠나 모르겠다"는 어머니의 말씀 속에는 기대에 만족하는 환희가 배어 있었다.
#겨울 채비의 마지막, 무'배추 건사
겨울 채비의 마지막 코스는 김장을 비롯해 무 배추를 건사하는 일이다. 우리집 김장은 항상 넘쳐났다. 겨울 반찬으론 김장김치를 능가할 것이 없는데다 김치가 없으면 전장의 병사에게 총알이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리라. 김장철만 되면 우리집에 있는 단지들은 총동원령 속에 맡은 바 임무에 따라 땅속 참호에 묻히기도 하고 짚동 사이에 숨어 배식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
붉은 배추김치를 필두로 백김치, 동치미, 무청김치, 고춧잎김치, 무말랭이김치, 씀바귀김치, 정구지김치, 파김치 등 손가락 다섯으론 턱없이 모자란다. 김장이 끝나면 남은 무 배추 잎들은 시래기로 엮어져 처마 밑에 걸린다. 그러고도 남은 무는 조림반찬의 밑받침과 이른 봄 나박김치용으로 구덩이에 묻히고 배추뿌리는 아이들 간식거리로 함께 묻혀 겨울잠에 든다. 어머니의 잡기장에는 무엇이 얼마나 저장되어 있는지 병참부대 출납담당 선임하사의 장부처럼 적혀 있고 보름 단위로 얼마나 소비되었는지 재고 파악이 소상하게 되어 있었다.
#밥이 모자랄 때는 무로 허기 면해
더러 식량이 모자라는 해에는 비상대책이 수립된다. 대책이란 게 별것 아니다. 나물이나 시래기를 많이 넣는 갱죽을 자주 끓이고 때론 밥솥 밑에 무를 채 썰어 무밥을 지어 양식을 아끼는 것이 겨울 버티기 작전이다. 밥이 모자랄 땐 심심하게 담근 김치 무를 큰 사발에 꺼내 와 밥은 되도록 작게, 숟가락 끝에 꾹 찍은 무는 크게 한입씩 베어 먹어야 가까스로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팔려가는 딸아이의 동영상을 보는 내내 무밥과 무김치라도 배부르게 먹여준 무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지금은 산에서 내려오지 않는 어머니께 감사를 드렸다. 어머니는 나를 시장에 데려가 백원에 팔아 버리지는 않았다. 땡큐, 맘.
구활(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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