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침공 10시간 지나서 육본 참모회의
1950년 6월 25일 오전 10시.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창경원 비원의 연못가에서 한가로이 낚싯줄을 던지고 있던 중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으로부터 북한공산집단의 남침 소식을 보고받았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국방장관이 아닌 치안국장으로부터 전해온 긴급사항을 보고받고 잠시 표정이 일그러졌으나 아무 말도 없이 긴 한숨만 삼켰다. 국방장관이나 참모총장처럼 큰 충격에 빠져 당황해 하는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노(老) 대통령의 심장이 젊은 그들보다 더 튼튼한 지도 몰랐다. 후일 대통령의 수행비서 황규면(黃圭冕)씨가 전한 이야기다.
이 대통령은 평소 북한공산집단의 남침 징후를 우려하는 국민 여론에 '북진통일론'으로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데 급급해 왔던 게 사실이다.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도 대통령의 정치성 구호에 장단 맞춰 "북괴군이 남침해 오면 즉각 반격에 나서 하루 만에 평양을 점령하고 사흘 만에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겠다"며 호언장담하기까지 했다. 이 말에 국민들은 우리 국군을 태산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나 군 수뇌부의 이 같은 황당한 주장은 결과적으로 남침을 감행한 북한공산집단에 '북침설'을 제기하는 빌미까지 제공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날 오전 9시 30분 북한공산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은 전면 남침이 성공리에 전개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평양방송을 통해 소위 '조선인민에게 고하는 메시지'를 직접 발표한다.
"남조선 괴뢰도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제안한 모든 평화적 통일방안을 거부하고 38선 북방인 해주지구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감행하여 공화국은 이를 격퇴하기 위해 즉각 반격을 명하였다. 이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후과(後果·결과)에 대하여 남조선 괴뢰도당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오전 11시에는 전면 남침의 책임을 대한민국에 전가하기 위해 선전포고까지 발령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얼마나 교활한 전략전술인가.
채병덕 참모총장은 오전 7시 국방장관에게 전황을 보고하자마자 육군본부로 달려갔으나 지휘권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그 시각까지 핵심 참모들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임한지 불과 일주일밖에 안 된 신임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은 오전 10시쯤에야 육군본부 작전상황실에 나타났다. 전쟁이 터지고 북한공산집단이 선전포고까지 했는데 주무국장이 전쟁 발발 6시간 만에 나타나다니 기가 막혔다. 이런 연유로 새벽에 소집된 육군본부의 전체 참모회의가 오후 2시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열리고 대비책을 논의하게 되었으나 적의 기습 공격이 개시된 지 10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 때문에 전군의 지휘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전쟁 발발 한나절이 못 돼 아군의 전황은 전 전선에 걸쳐 극히 불리한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괴물같은 T-34 탱크를 앞세우고 침공해온 적의 막강한 전력에 너무도 열세한 아군의 병력과 장비가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평소 방심하던 군 수뇌부의 지휘권 혼란이 총체적으로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 시각 경무대에서도 즉각 비서관들을 긴급 소집했으나 제대로 연락이 닿지 않아 정오쯤에야 대책을 논의할 수 있었고 곧 이어 임시 국무회의에 들어갔으나 채 총장이 달려와 "북괴군의 전면 남침이라기보다 남파 간첩 이주하·김삼룡을 석방하라"는 움직임 같다고 보고했다. 전 전선이 무너지고 혼란에 빠져 극도로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데도 명색이 육군 참모총장의 입에서 전면 남침이 아니라는 말이 나오다니 이게 제 정신인가.
바로 이때 채 총장의 발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적의 야크 전투기 4대가 서울 상공에 나타나 중앙청과 육군 본부 인근 용산에 기총소사를 가하고 김포 비행장을 공습했다. 임시 국무회의는 야크기의 출현으로 뒤숭숭했으나 그나마도 채 총장의 보고를 받고 다소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6월 25일은 미국 워싱턴 시각으로 24일 토요일 밤.
미국 행정부는 북한공산군의 전면 남침 소식을 접하고 재빨리 움직였다. 자신들의 과오를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 군정을 실시하면서 애초부터 한반도 정책에 소극적인 입장을 고수해 왔다. 한국에 대한 방위 공약은커녕 아예 극동방위선에서도 제외시켜 버렸다.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우습게 보고 극동방위 전초선을 알루션 열도에서 일본을 거쳐 오키나와(沖繩) 열도와 필리핀으로 제한했던 것이다.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북한공산집단으로서는 이 같은 미국의 극동방위정책을 역이용할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의 이런 조처는 저들이 불법남침을 감행해도 미국이 쉽사리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유엔주재 미 대사는 "북한공산집단의 전면 남침은 그 책임이 소련에 있다"고 지적,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소집을 요구했다. 유엔 한국위원단에서도 북한공산집단의 무력침공으로 판단하고 "국제평화와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다"며 공식적으로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고했다.
그 결과 소련이 불참하고 유고슬라비아가 기권한 가운데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9개 이사국의 만장일치로 공산군의 즉시 철퇴를 결의하게 된다. 이와 함께 존슨 미 국방장관은 "만약 소련이 북한공산집단에 실질적인 원조 제공과 남침을 사주한 사실이 확인되면 미국은 주저없이 출전할 것"이라고 소련을 규탄했다.
하지만 같은 시각 한국은 극도의 위기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은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게 전황이 호전되고 있다고 기만하는 데만 급급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대통령은 전 국토가 불바다로 변하고 대구가 풍전등화에 휩쓸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후일 황규면 비서관이 전한 이야기다.
국방장관과 참모총장 등의 안이한 보고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이 함락되기 24시간 전 피란길에 오르게 된다. 그로서는 상상도 못한 피란길이었다. 덜커덩거리는 특별열차를 타고 대구까지 내려간 이승만 대통령은 열차가 대구역으로 들어서자 다시 돌리라고 호통을 친 다음 조재천(曺在千) 경북지사와 유승열(劉承烈) 제3사단장을 불러오게 했다.
이 대통령은 연락을 받은 두 사람이 급히 달려오자 "자네들은 동요하지 말고 싸우게. 나 다시 가야겠네"라는 이 말 한마디를 남기고 대전으로 올라간다. 대통령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 두 사람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고 했다. 27일 정오가 조금 지나서였다. 대통령 내외는 그때까지 입에 아무 것도 대지 않았다. 제1차 임시 수도가 대전으로 정해진 연유다.
이용우(언론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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