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폭풍, 폭풍!" 새벽 4시 정각, 전 전선에 '남침명령'
1950년 6월 24일 자정.
조선인민군 제2집단군(군단) 사령부 작전부장 이학구(李學九) 총좌(남한의 대령과 준장 사이)는 의정부 북방의 은폐된 벙커에서 소련제 군사용 야광(夜光)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며 초조하게 줄담배만 빨아당기고 있었다. 심신이 몹시 피로했다.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그러나 운명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6월 25일 새벽 4시 정각. 야전책상 앞에 앉아 왼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잠깐 조는 사이 평양 모란봉의 최고사령부 작전상황실과 연결된 핫라인이 요란하게 울렸다.
"폭풍, 폭풍, 폭풍!"
최고사령부 총부참모장 겸 작전국장인 류성철 중장(한국의 소장)이 외친 공격개시 암호명 '폭풍'이었다.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이학구는 다급하게 전 전선에 걸쳐 자동버튼으로 연결된 핫라인을 가동하면서 공격 명령 '폭풍!'을 복창한 뒤 급히 벙커에서 뛰쳐나와 안개 자욱한 허공으로 적색 신호탄을 연거푸 세 발이나 발사했다. 남침 작전을 알리는 공격 신호탄이었다. 모든 병력과 중화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일선 전사(보병)들의 근접 공격과 동시에 육중한 122밀리 곡사포와 105밀리 박격포, 76밀리 스탈린포 등 각종 중포의 위장망이 벗겨지면서 포구(砲口)에서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각종 포탄이 장전되기 무섭게 허공을 가르며 탄착지점을 향해 날아가 우박처럼 쏟아지면서 "콰쾅!" 하고 지축을 뒤흔들었다. 240여대의 소련제 T-34 탱크도 일제히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자욱한 안개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전선은 그야말로 지축을 뒤흔드는 포성과 굉음과 총성으로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북한공산군의 이른바 보전포(步戰砲) 삼위일체가 전면 남침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같은 시각.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여전히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명동이나 충무로 등 도심지 번화가 곳곳에는 밤새도록 흥청거렸다.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통금시간도 외면한 채 각 유흥업소에서는 흥겨운 밴드와 노랫가락이 새벽녘까지 흘러 나왔다. 거리는 인적이 드물었으나 통금제한을 받지 않는 군복 차림의 취객들이 삼삼오오 떼지어 흐느적거리며 고성방가로 새벽의 정적을 깨뜨리곤 했다. 등화관제로 전시체제에 돌입한 적도(敵都) 평양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25일 새벽 2시가 지날 무렵.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다급한 적정보고가 날아들었다. 옹진반도 국사봉 북쪽 능선에서 적의 대병력이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뚫고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다는 옹진 파견대의 보고였다. 이어 새벽 3시쯤엔 문산 구화리 임진강변에서 도하용 주정을 운반하는 적의 동향이 포착되었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 당직 장교들이 이런 일련의 보고를 접하고 예삿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무렵인 새벽 4시 30분 쯤 포천 동북방의 만세교 북쪽에서 적 탱크의 엔진 소음과 함께 캐터필러 구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보고가 무전으로 들어왔다.
바로 그 무렵 포천 방면의 국군 제7사단 정보처 캠프에 적의 122밀리 곡사포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박처럼 쏟아지며 작열하는 포탄의 강도로 보아 적의 전면 남침이라는 판단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려했던 일이 결국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적의 파상공세는 제3, 제4돌격사단과 105탱크여단이 서울로 직행하기 위해 의정부·동두천 정면으로 공격해 오고 있었고 적 1사단은 고랑포 방면의 아군 제1사단 정면으로 밀고 들어왔다. 피아간에 1사단끼리 교전이 붙은 것이다. 그러나 중과부적. 적 6사단도 아군 1사단 12연대가 포진하고 있는 개성으로 주공격로를 정해 파상 공격을 가해오고 있었다. 그 중 중국 팔로군 출신 조선의용군인 6사단 일부 전투 병력과 38경비여단은 아군 제17독립연대가 포진하고 있는 옹진반도 정면으로 기습해 왔다.
적 2사단과 7사단은 춘천과 홍천 정면, 5사단은 강릉 방면으로 기습공격을 가해 오는 등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공세를 취해 왔다. 마침내 옹진반도 정면으로부터 개성과 장단·의정부·동두천·춘천·강릉 등 38선 11개소의 아군 주진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38선 남방한계선에 포진하고 있던 국군 방어진지 곳곳에는 적의 122밀리 곡사포를 비롯한 각종 포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아군의 방어진지는 미처 탄막사격으로 반격하기도 전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오전 4시 30분쯤 육군본부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이 참모총장 관사로 다급하게 경비전화를 걸어왔다. 채병덕 총장은 취침 중이라 전속부관이 대신 받았다. 전속부관은 곤하게 자고 있는 채 총장을 깨우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고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채 총장을 깨워 수화기를 건넸다. 잠결에 일어난 채 총장이 귀찮은 듯이 수화기를 받는 순간 벌떡 몸을 일으키며 특유의 거친 서북사투리로 외쳤다. 그는 평양이 고향이다.
"뭐이 어더레(무엇이 어떻게)?"
"터졌습니다. 북괴군이 전면남침을 감행했습니다." "뭬라구?" 아니, 어케(어떻게)?"
"북괴군이 오늘 새벽 4시를 기해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현재 아군 방어선이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야야, 이거 난리났구만 기래(그래). 던군(전군)에 비상하라. 각 국당(국장) 모두 모이라우."
장 국장은 채 총장에게 보고하고 전쟁 발발 1시간 40분 만인 오전 5시 40분 쯤 맨 먼저 육군본부 상황실로 달려갔다.
바로 이때 강문봉 대령이 헐레벌떡 채 총장 관사로 직접 달려와 초인종을 눌렀다. 그는 비록 무보직이었으나 육군본부 작전상황실의 전화 연락을 받고 우선 긴급대책이라도 마련할 요량으로 총장 관사로 달려간 것이다.
채 총장은 급히 일어나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뒤 오전 6시쯤 국방장관 공관인 마포장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신호는 가는 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비서실장 신동우 중령부터 먼저 불러 강문봉 대령과 함께 집을 나섰다. 그 길로 셋이서 같은 지프에 타고 마포장으로 달려가 보니 신 장관은 그 때까지도 세상천지 모르고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채 총장이 침실로 뛰어들어가 신 장관을 깨운 것이 오전 7시. 적의 남침 3시간 후였다. 신 장관은 엉겁결에 잠옷 바람으로 응접실에 나와 지도를 펴놓고 채 총장의 보고를 받는 순간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사뭇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육군본부 작전상황실에서는 오전 6시를 기해 전군에 긴급비상령을 내리고 김백일(金白一) 참모부장을 비롯한 각 참모들을 소집했으나 장도영 정보국장과 이치업 작전국 차장이 먼저 나와 진두지휘하고 있을 뿐 모두 늦잠에 골아떨어져 좀체 깨어나지 못했다.
장교클럽 낙성 축하파티가 당초 24일 밤 10시에 끝날 예정이었으나 육군본부 고급장교들과 미 군사고문관들이 어울려 댄스파티를 즐기며 흥겨운 분위기가 고조되는 바람에 2차까지 이어져 25일 새벽 2시에서야 끝났기 때문이다. 적의 전면남침이 전개되기 불과 두 시간 전이었다.
이용우(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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