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랑 산사람] 순천 조계산

입력 2010-04-15 14:20:00

두 명찰 거느렸으니 명산 따로 없네

명산(名山)의 조건 중 하나는 명(名) 사찰을 품는 것이다. 둘의 조합은 상승효과를 불러와 산, 사찰 모두 가치를 주고받는 윈윈 작용을 한다. 그러나 따로 떼어 놓고 주와 종을 따진다면 산꾼들에겐 산에 무게중심이 쏠리는 것이 사실이다. 오르려는 본능 때문이다. 이런 통념을 보기 좋게 흔들어버리는 곳이 있으니 바로 조계산이다. 조계산은 그 자체로 훌륭한 산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월출산, 무등산과 삼각점을 이루며 호남의 산맥을 든든히 떠받치는 기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송광사, 선암사의 명성에 대입하는 순간 산의 위상은 빛을 잃는다. 두 사찰엔 가람 배치, 조경뿐 아니라 승보(僧寶)사찰로서의 위상까지 문화재적 가치가 잘 배색(配色)돼 있다. 뚜렷한 개성으로 세인(世人)들의 품평에 오르며 일찍이 호남의 대표 가람으로 자리 잡았다. 이 가치들에 밀려 조계산은 두 절을 이어주는 가교(架橋) 쯤으로 평가절하되고 만다. 산도 불만은 없다. 명찰을 둘씩이나 거느렸고 두 절의 중심에서 균형추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으니 말이다.

#선계로 향하는 문? 승선교 강선루

선암사 여행은 사하촌에서 일주문까지 이어진 흙길에서 시작된다. 계곡, 그늘, 청정한 기운이 넘치는 이 길은 전국 최고의 명상로 중 하나. 절 입구에 다다르면 승선교와 강선루가 산꾼들을 맞는다. 다리 하나 누각 하나로 선계(仙界)를 펼쳐놓은 발상이 놀랍다. 이곳에서의 뷰포인트는 승선교 아래에서 강선루를 올려보는 것. 다리의 아치가 조망을 위한 창(窓)으로도 기능을 한다. 무지개 모양의 아치 속으로 강선루가 빨려들 듯 들어온다.

선암사 경내엔 봄꽃들이 경연장을 열었다. 홍매, 목련, 산수유와 야생화들이 사찰 곳곳을 장식했다. 흔히 송광사와 선암사는 도시 처녀와 시골 처녀로 비유된다. 송광사가 3보 사찰의 명성을 배경으로 도회지 분위기를 지녔다면 선암사는 고색창연한 수도도량으로 가치를 키웠다. 한 산자락에서 이처럼 뚜렷한 개성의 대비로 가치를 공유(共有)하는 것, 이게 바로 상생일 것이다.

선암사 경내를 나온다. 올 때 무심코 지나쳤던 삼인당(三印塘) 연못이 눈길을 끈다. 물이 흔한 절의 특성을 살려 개성 있는 못을 꾸몄다. '모든 것은 변하여 머무르는 것이 없으니 이를 알면 열반에 들어간다.' 연못가 비문에 새긴 열반적정(涅槃寂靜)을 화두 삼아 장군봉을 향해 오른다.

등산코스는 선암사-장군봉-작은 굴목재-선암사 굴목재-보리밥집-송광사 코스로 잡았다. 장군봉에서 장밭골 삼거리-연산봉으로 쭉 뻗어가고 싶었지만 코스를 수정했다. 보리밥집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장군봉 오르면 호남 산들이 한눈에

조계산은 호남의 동쪽에 우뚝 솟아올라 사위(四圍)가 시원스레 트인 산이다. 700고지만 올라도 광양 백운산, 지리산 반야봉, 노고단이 가시권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을 때는 연봉(連峰)들 물결 너머로 순천만을 감상할 수 있다.

장군봉(884m)에 이르렀다. 저 멀리 상사호가 은빛 물결로 일행을 맞는다. 밑엔 봄꽃들이 제 세상을 만났지만 산 속은 아직 제 색깔을 갖추지 못했다. 활엽수들이 이제야 잎을 틔우기 시작했다. 잿빛이 대세인 산속에서 산죽만이 홀로 푸름을 자랑한다.

미로 같은 산죽 길을 타고 선암사 굴목재 쪽으로 내려간다. 선암사 굴목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멀리서 보리밥집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정겹게 다가온다. 나무 아래로 10여개의 평상이 놓여 있고 손님들은 물가든, 나무 밑이든 제멋대로 자리를 잡는다. 여기선 장작불에 불을 지펴 밥을 하고 숭늉을 끓인다. 대충 끓여 낸듯한 시래기국에서 깊은 속맛이 우러난다. 이집의 또 다른 별미는 멸치젓. 알맞게 삭은 젓갈이 채소들과 어울려 오묘한 맛과 향기를 느끼게 한다.

보리밥집을 나서서 바로 송광굴목재로 향한다. 선암사굴목재-송광굴목재를 넘는 고갯길 코스는 일명 변두리 횡단코스. 조계산을 동서로 횡단해 야트막한 고갯 길을 형성하고 있다. 등산로라기보다는 트레킹 코스에 가깝다. 보리밥집에서 30분쯤 오르면 천자암 갈림길과 만난다. 송광굴목재에서 송광사에 이르는 등산로는 이른바 '홍골'이라고 불리는 단풍나무 군락지. 지금은 이른 봄이라 지난 가을의 흔적들만 계곡에 가득하고 생강 꽃들이 대신 길을 밝혀준다.

#3보 사찰로 유명한 송광사 '조경 1품'

송광사 가람 배치의 가장 큰 특징은 대문 바로 앞에 계곡을 배치한 것이다. 풍수적으로 임수(臨水)라 해서 집 가까이에 물을 두기는 하지만 앞마당 바로 앞에 계곡을 설계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도 이런 파격이 색(色)과 공(空)을 넘어선 경지이리라.

송광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답게 승보(僧寶)사찰로 일찍부터 명성을 떨쳐왔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지눌대사를 비롯한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했다. 송광사는 세 가지 보물로 유명하다. 수령 800년을 자랑하는 쌍향수, 쌀 일곱 가마의 밥을 한번에 담을 수 있다는 비사리구시, 부처님 공양 올릴 때 쓰는 그릇 능견난사(能見難思)가 그것이다. 국보급 사찰답게 유물들도 중량급들이다.

흔히 절의 규모를 추측하는 기준으로 당간지주의 크기와 말구유, 공양(주방) 기구를 든다. 이 곳 비사리구시는 솥의 개념을 넘어 작은 배만한 크기를 자랑한다. 수천명이 동시에 공양할 정도의 크기다. 이만한 사세(寺勢)였다면 호남 제1사찰로 위상을 떨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4월의 송광사, 봄은 물소리로부터 온다. 절 입구 임경당, 우화각 밑으로 계곡물이 맑게 흐른다. 벌써 열반에 든 벚꽃들이 연분홍의 점으로 계곡을 유영한다.

선암사, 송광사, 조계산은 물(H₂O)을 닮았다. 산소 1개, 수소 2개의 화합물인 물, 산 하나에 절이 두 개인 이곳과 비슷하다. 산소와 수소는 자체로 인류에게 불가결한 물질이다. 이것들은 수시로 몸을 나누고 뭉쳐 다른 물질들을 만들어낸다. 수소 두 개와 산소 하나가 만나 인류 생명의 기원인 물을 만들었듯 조계산도 이 둘을 결합시켜 '호남 제1도량'이라는 불교 성지를 만들어냈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