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랑 산사람] 영암 월출산

입력 2010-04-08 08:43:36

아침 하늘의 불꽃 같은 기상 곳곳에 명품바위

영암 사람들은 월출산을 해남이나 목포로 가는 길에 들르는 정류소쯤으로 여기는 것에 불만이 크다. 영암은 고대부터 호남의 한 축이었고 많은 인물을 배출한 추로지향(鄒魯之鄕)이었다. 고대 일본 아스카문화의 비조(鼻祖)로 추앙받는 왕인 박사, 신라말기 풍수사상의 대가였던 도선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조선시대 최고 서예가의 한석봉도 여기서 서법에 정진했다. 또 영암은 고대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국제항이었다. 최치원의 도당(渡唐) 유학 출발지였고, 천자문과 도공을 실은 왕인 박사가 도일(渡日)의 닻을 올린 곳이 영암의 상대포(上臺浦)였다. 이런 영암 뜰에 몸을 일으켜 역사와 문화의 복판에서 무게중심을 이루며 물산(物産)을 넉넉히 안은 산이 있으니 바로 월출산이다.

#음양 기운 절묘한 조화 이룬 호남 명산

조선시대 풍수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월출산을 '아침 하늘에 불꽃 같은 기상(火乘朝天)을 지닌 산'이라고 평했다. 설악산, 마니산, 주왕산과 함께 한국에서 암릉을 자랑하는 악산(岳山) 중 하나로 꼽힌다. 공룡 지느러미처럼 솟은 거친 바위들은 불꽃을 연상시켜 화기가 팽만한 양기(陽氣)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월출'(月出) 이름을 풀어보면 음의 극점인 달과 만난다. 양의 형세와 음의 기운을 동시에 지닌 것이다. 이 둘은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동시에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이것이 월출산만의 매력인 것이다.

월출산은 소백산계의 무등산 줄기에 속해 있으며 전남 영암군과 강진군 사이에 걸쳐 있는 한반도 최남단의 산악 국립공원이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산세의 위용은 대단하다. 최고봉인 천황봉을 비롯해 구정봉, 장군봉, 향로봉, 도갑산으로 이어지는 우람한 스카이라인은 산꾼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다.

월출산을 구성하는 돌의 80%는 맥반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맥반석은 원적외선을 내뿜는다고 해서 건강식품과 건강기구에 많이 응용되고 있다. 그래서 월출산은 예부터 기(氣)가 충만한 산으로 유명하다. 특히 관운(官運)에 영험한 것으로 알려져 공직자들이 많이 찾았다. 옛 관선시절 부군수들은 관운을 타기 위해 매일 새벽 산에 올랐다고 한다. 월출산에 1천 번 오르면 부(副)자를 떼 준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남도에 봄기운이 막 상륙하는 4월 취재팀은 월출산으로 향했다. 보통 월출산 등반코스는 천황사~구름다리~천황봉~구정봉~도갑사로 이어지는 9㎞ 종주능선이 주를 이룬다.

#천황사~도갑사 9㎞ 종주코스 인기

천황사 입구에 들어서니 푸른 대나무숲과 동백숲이 산꾼들을 맞는다. 산등성이엔 진달래들이 제법 꽃무리를 이루었다. 매봉을 돌아나온 시원한 바람 덕에 산행길은 더없이 쾌적하다.

급경사길을 한시간쯤 오르니 화려한 오렌지색으로 단장한 구름다리가 나타난다. 원색 계열의 강한 톤이라 거부감이 들 것도 같은데 의외로 주변 신록이나 바위와 잘 조화된다. 시루봉과 매봉을 연결하는 이 다리는 지상 120m 높이에 길이 50m, 폭 60㎝로 설계됐다. 다리에서 고개를 내밀면 깎아지른 듯한 매봉이 시선을 위압하고 남쪽으로는 초록의 빛깔을 한껏 높인 영암의 들판이 한눈에 펼쳐진다. 이 다리는 강천산, 대둔산 구름다리와 함께 호남의 '3대 구름다리' 중 하나다. 작년에 '1박2일'에 소개되고 나서 연간 관광객 수가 30만명에서 45만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취재팀은 사자봉을 거쳐 천황봉으로 오르는 또 한번의 급경사길에 도전한다. 해발 800m 남짓한 산이지만 순수한 해발 높이 산행인데다 등락폭이 워낙 심해 웬만한 1,000m급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산행 두시간 만에 일행은 천황봉의 정상석을 찍었다. 산정엔 이미 수백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다들 기념촬영 하랴 산상 오찬을 즐기랴 여념이 없다. 밑에서 보면 뿔처럼 위태해 보이는 정상에 이런 넓은 평지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구름다리 못지않게 월출산의 브랜드를 키운 데는 전시장을 연상케 하는 수천 수만의 기암괴석도 한몫 했다. 산 구석구석엔 인물상과 동물상, 구상과 추상 요소를 갖춘 갖가지 모양의 바위들이 널려 있다. 규모가 워낙 방대해 안내책자를 들고 꼼꼼히 챙겨봐야 명품바위들을 두루 감상할 수 있다.

#아홉 우물 신비 간직한 구정봉 조망 환상

구정봉 직전에 위치한 바람재는 이름값을 하려는지 심술궂은 바람으로 일행을 위협한다. 아마도 경포대 능선과 온천계곡의 기류가 이곳에서 부딪혀 기운찬 풍세를 만들어 내는 것이리라. 월출산에서 구정봉은 산의 중앙이다. 천황봉에게 정상을 내주었지만 조망이나 상징성, 산세 면에서 천황봉에 어필할 만하다. 도갑사로 진행하는 팀들은 돌아나오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지만 제값을 하므로 꼭 등산코스에 포함시키길 추천한다.

구정봉(九井峰)은 말 그대로 아홉 우물의 봉우리. 봉우리 정상에 다양한 크기로 절구통 모양의 홈이 패여 있다. 이 우물들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는 법이 없다 하니 신기하기만 하다. 풍수가들은 물이 귀한 산에 수화(水火)의 기운을 조화시켜 주는 보물이라고 말한다.

구정봉 바로 밑자락엔 임진왜란 때 여인들이 난을 피해 베를 짰다는 베틀바위가 들어서 있다. 여인네들의 거처답게 이 굴은 음기가 서려있다. 혹자는 이곳의 음혈과 천황봉 근처 남근석이 음양 조화를 이뤄 수많은 기암괴석들을 출산(?)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취재팀은 미왕재 억새밭을 지나 도갑사로 향한다. 가을 내내 화려한 군무를 뽐내던 억새는 아직도 기상을 잃지 않고 대열을 유지하고 있다. 억새 군락지를 지나 계곡을 끼고 40분쯤 진행하면 종점인 도갑사가 나온다. 도갑사는 신라 말에 도선 국사가 창건한 절로 국보인 해탈문이 들어서 있다. 유홍준 교수가 '국보 자격 시비'로 혹평을 해서인지 지금은 지붕을 해체하고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하고 있다. 절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해탈문을 나선다.

해탈은 '심신의 고뇌'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불가 수행자들에게 지고의 목표이기도 하다. '통과만으로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문을 나서면서도 의심은 꼬리를 문다. '믿음대로 된다'고 경전은 말하는데. 언제쯤 이런 회의와 미욱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해탈문 아래 와선형 돌계단이 흐릿한 잔영으로 사라진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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