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내면엔 또 하나의 내가 있다고 한다. 그걸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선 '내면의 아이'라고 부르는데, 내면의 아이는 억압된 무의식을 표현한다.
이런 억압된 무의식은 내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나를 힘들게 한다. 분노, 시기, 질투, 우울, 불안, 유치함과 유약함. 내면에 꾹꾹 눌러둔 것들이 이런 방식으로 표출될 땐 내가 왜 이런 감정에 휩싸이는지도 모른 채, 스스로 상처를 받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 그것도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내면의 아이는 늘 내가 돌보고 감싸주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그 이름도 '아이'가 아닌가.
내 경험으론 그 아이는 대화를 좋아한다.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주기를 바라고 사랑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꾹꾹 잘 눌러두면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그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고 억눌러 버리면 아이는 더 깊이깊이 숨어버리고 결국엔 더 확실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는 마음의 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실제로 몸 어딘가가 고장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분노, 시기, 질투, 유치함과 유약함 같은 단어들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들이라 여긴다. 어쩌면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강박증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그래야 괜찮은 사람일 수 있으니까. 그래야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덜 상처받으며 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요즘은 그런 감정들을 인정하지 않고는 온전히 내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는 정말 솔직해질 수 없다는 걸 느낀다.
돌아보면, 나도 아주 오랫동안 내면의 아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너무 커버렸지만 내 내면은 여전히 대여섯 살의 아이로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존재가 너무도 낯설었다.
하지만 내가 이만큼 컸기 때문에 이젠 좀 더 잘 돌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돌본다는 게 따로 있겠는가. 이야기를 걸어올 때 가만히 귀 기울여 주고 '그래, 그래'하며 맞장구쳐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의 마음이 좀 괜찮아질 때쯤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 우리 정말 이것 때문에 너무 힘들다, 그치? 그러니까 우리 이 일은 이제 보내버리자. 이 마음은 이제 털어버리자. 다시는 우리를 힘들게 하지 않도록.'
내 마음을 돌본다는 건 그렇게 내게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쏟는 일이다. 내 유치함과 나약함, 단점과 약점을 인정하고 인정한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전문주 방송작가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국정원, 中 업체 매일신문 등 국내 언론사 도용 가짜 사이트 포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