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이건희' 그는 과연 누구인가

입력 2010-03-31 07:31:34

▨이건희 스토리/이경식 지음/휴먼앤북스 펴냄

세계적인 기업가이자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는 이건희. IOC 위원, 밴쿠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에게 정부 포상금의 반을 사비로 지급할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신경영'의 기치를 들고 '삼성그룹'을 명실공히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운 기업가, 한국 경제를 견인하는 리더십의 대가라는 평가와 동시에 부정한 방법의 2세 승계, 오직 일등을 향해 달려가는 냉혈한, 유죄와 특별사면으로 법치를 무색하게 한 사람….

'대체 이건희는 누구인가?'

우리는 각자 자신이 보고 싶은 방향에서 이건희를 본다. 그래서 이건희가 짓는 여러 가지 표정 중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이건희'만 본다. 그런 까닭에 이건희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고, 각자가 바라보는 한쪽 면의 이건희는 진실인 동시에 거짓이다.

'생애와 리더십'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지금까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인간 이건희'의 초상에 관한 이야기다. 지은이는 이건희에 대한 막연한 칭송이나 폄훼를 배제하려고 애쓰고 있다. 사람들이 흔히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경제인 이건희의 공과(功過)'보다는 한 '인간 이건희'를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책은 '나무를 깎아 만든 닭' 목계(木鷄)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이는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친구가 없었던 초등학생 시절의 이건희, 승승장구해왔지만 만족하지 않는 이건희, 시종 무표정한 표정을 짓는 이건희를 상징함과 동시에 이 책의 방향을 암시한다.

'이건희 스토리'는 아들 이건희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버지 이병철과 나란히 앉아 찍은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한다. 사진에서 젊은 아버지 이병철은 단호한 의지와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 아버지 이병철이 범접하기 힘든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있다면 아들 이건희는 다소 불만에 찬, 그리고 약간 겁먹은 얼굴이다. 아버지 이병철이 결코 패배를 모르는 강인한 남자의 얼굴이라면 아들 이건희의 얼굴에는 아이다운 천진함이나 호기심, 장난기가 조금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울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있지만 그 표정에는 편안함이나 안도감이 보이지 않는다. 이건희는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이 책 '이건희 스토리'는 어린 이건희가 그런 표정을 지어야만 했던 이유와 우리가 이건희에 대해 가지는 인상(앞서 밝혔듯 이건희에 대한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다)의 근거를 밝히고 있다. 지은이 이경식은 이를 밝히기 위해 수십 권의 책과 온갖 뉴스, 칼럼, 인터뷰 등을 인용하고 있다.

책은 외로웠던 이건희의 어린 시절부터 삼성의 후계자가 되기까지, 후계자가 된 뒤에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오랜 세월 기다려야 했던 시절, 신경영의 기치를 들고 도약하던 시절, 1등을 향한 무한 도전과 이로 인한 오점과 얼룩, 유죄와 특별사면 등 희로애락과 오욕을 심층적으로 조명하고 있다.(대면인터뷰가 없었다는 점은 이 책의 약점인 동시에 객관성 확보라는 점에서 장점으로 작용한다.)

'나는 혼자 자라서 가정교육을 1%도 받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이 한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이는 과장이다. 그럼에도 이건희 회장이 그렇게 확언했던 것은 그만큼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본인이 진실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이다. 1942년 1월 대구에서 태어난 이건희는 초등학교 시절에만 5번 전학을 다녔을 만큼 떠돌아다녔으며 젖을 떼자마자 부모와 헤어져 경남 의령의 할머니 손에서, 할머니가 어머니인줄 알고 자랐다.

일본 동경 유학 시절, '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별장에 살았다'는 소문이 나 있었지만 실제로 그는 차고 위 방 두 개짜리 방에서 살았으며, 식사도 라면과 '짠지'로 때우기 일쑤였다. 용돈 사용 내역을 일일이 메모하고 아버지에게 보고했다.(이건희의 고교 스승 한우택 교사가 일본 방문 중에 이건희 집에 며칠 머무르면서 목격한 내용이다.)

친구가 없었던 이건희는 학창 시절 럭비와 레슬링에 빠져 지냈다. 일단 경기가 시작되면 눈이 와도 비가 내려도 멈추지 않는 럭비, 걷기조차 힘든 진흙탕 속에서 온몸으로 부딪치고 뛰며 오직 전진이라는 목표를 향해 태클과 공격을 반복한다. 악천후를 이겨내는 불굴의 투지, 하나로 뭉치는 단결력, 태클을 뚫고 나가는 강인한 정신력…. 이건희는 운동을 통해 집단을 알았고, 팀플레이를 알았다. 그러나 이건희에게 집단이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따뜻한 공동체가 아니라 동일한 목표를 향해 투쟁하는 조직체 개념이었다. 삼성그룹의 회장이 된 후에도 그가 끊임없이 위기를 이야기하며 전투를 독려하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 가치관일지 모른다.

이건희는 집착하고 몰두했다. 그는 경영자이지만 기계광이었고 그의 서가엔 경영학 서적보다 전자, 우주, 항공, 자동차, 엔진공학, 미래공학 등 전문 서적이 더 많다. 수많은 자동차를 직접 분해하고 조립해봤으며 무엇이든 겉모습뿐만 아니라 속 즉, 본질까지 뚫어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 특성처럼 인재를 고를 때도 여러 분야에 고루 뛰어난 사람보다 한 분야에 뛰어난 '마니아'형 인재를 선호했다.

지은이는 이건희가 삼성을 장악해가는 과정의 권력 투쟁을 조선 태조 이성계와 이방원에 비유하기도 하고 인내로 일본 전국시대를 종식시켰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비유하기도 한다. 간략하게나마 그들의 역사도 소개함으로써 책 읽는 재미를 더한다. 책은 김용철 변호사의 이른바 양심선언,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선언, 3세 승계 등 삼성과 관련한 최근의 상황까지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말미에서 지은이는 '목계(木鷄)는 닭일까, 나무일까?'라는 질문을 다시 던진다. 목계는 표정이 없으니 어떤 닭과 마주서도 겁먹는 법이 없고 언제나 이긴다. 그러나 한편 피와 깃털과 숨결이 없으니 닭이 아니라 나무일 뿐이다. 목계가 닭이라면 최상의 자리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목계가 나무라면 깃털과 숨결을 잃어버렸다는 데 초점을 맞춘 답이 될 것이다.

지은이 이경식은 서울대 경영학과와 경희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영화 '개같은 날의 오후' '나에게 오라', 연극 '동팔이의 꿈'을 썼다. '이건희 스토리'는 시종 시적이고 고급스러운 문체로 읽는 재미가 있다. 511쪽, 2만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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