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까지 동양평화 삼창 제안한 사상가"

입력 2010-03-26 09:48:53

100년전인 1910년 대구시 중구 계산성당앞 전경. 성당 앞쪽 와가집이 당시 교육기관이던 해성재(효성초교 전신)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100년전인 1910년 대구시 중구 계산성당앞 전경. 성당 앞쪽 와가집이 당시 교육기관이던 해성재(효성초교 전신)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旅順)감옥. 새벽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바람까지 거세게 불어 처연한 분위기였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 집행을 앞두고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안 의사는 간수들에게 함께 '동양평화' 삼창(三唱)을 하자고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2분간 기도를 드리고는 뚜벅뚜벅 교수대로 걸어 올라갔다. 당당하고 의연했다. 그때가 오전 10시 4분. 비록 32년간의 짧은 생을 마쳤지만 그 정신과 의기는 천년을 두고 살아 남을 것이다. 순국 100주년을 맞아 안 의사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아봤다.

◆ 대구와도 각별한 인연

"안중근 의사가 대구에서 시국강연을 했다?"

26일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을 맞아 안 의사와 대구와의 인연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초점은 안 의사가 대구를 방문했는지 여부다.

간접적인 단서는 2개가 있다. 먼저 중구 계산동 계산성당 옆 성물 판매점 한쪽 담벼락의 '근대路의 여행-계산성당과 대구전경(1910년대)' 사진 설명에는 '성당 앞쪽 기와집은 안중근 의사가 강연도 했던 당시 교육기관 해성재~'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전시물을 설치한 동산의료원 정성길 명예 박물관 원장은 "현재는 세상을 떠난 가톨릭계 인사에게서 해성재에서 안 의사가 강연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썼다"고 말했다. 2007년 발간된 '대구 신택리지' 258쪽에도 해성재에 대해 설명과 함께 역시 안 의사가 강의를 했던 곳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 책자 출간 당시 정보를 제공했던 대구흥사단 최현복 사무처장은 "어디선가 발췌한 내용인 듯한데 기억이 없다"고 했다.

전문가들 역시 안 의사가 대구를 다녀갔을 개연성이 큰 것으로 추정하지만 직접적 증거는 없다고 했다.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순국 100년 안중근 국채보상운동, 동양평화로 피어나다' 특별전을 기획한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 큐레이터는 "1907년 8월 안 의사가 부산을 거쳐 연해주로 망명했는데 그 과정에서 대구를 거쳐 갔을지도 모른다"며 "안 의사가 체포된 뒤 일본 검찰이 심문을 벌인 기록을 보면 3년 전부터 거사를 준비했다고 했으니 그때 강연을 했다면 거사 실행을 다짐하는 자리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 의사 연구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도 "1907년 안 의사가 국채보상운동 관서지부장을 맡은 데다 같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 때문에 대구의 서상돈 선생과 정신적으로 가까웠을 것이다. 안 의사의 친척도 대구에 여럿 있었기 때문에 방문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직접적 기록을 찾을 수는 없었다. 순흥 안씨 종친회 사무국에 문의한 결과 "관련 기록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고, (사)안중근의사숭모회 최명제 사무국장 역시 "안 의사가 남긴 옥중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비롯해 남은 자료들을 수차례 읽어봤으나 찾지 못했다"고 답했다.

안 의사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에서 대구 가톨릭계 기록도 샅샅이 찾았지만 남아 있는 기록이 없었다. 대구의 초대 교구장이었던 플로리앙 드망즈(한국 이름 안세화) 주교가 남긴 '드망즈 주교 일기'와 대구대교구 '교구 100년사 자료집' 모두 안 의사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대구대교구 100년사 편찬을 준비하고 있는 김태형 신부는"1960년대 교구청 자료실이 화재로 전소되면서 사라진 자료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며 "현재 남아 있는 자료로는 확인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채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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