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우는 전화번호·노래가사 거의 없어 '디지털 치매' 현상
'2010년 트렌드를 이해하려면 두 아를 알아야 한다'는 우스개가 있다. 아이폰과 아바타가 몰고 온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지난해 말 국내에 아이폰이 출시되면서 불어닥친 스마트폰 열풍은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스마트폰은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뉴스는 물론 할인항공권 가격 비교, 재테크 등 생활에 필요한 웬만한 정보를 검색할 수 있어 이른바 모바일 라이프 시대를 열고 있다.
PC와 초고속통신망, 휴대폰과 내비게이션, MP3와 PMP 등 디지털은 이미 우리 생활 깊숙한 곳까지 지배하고 있다. 그만큼 편해졌지만 무조건 좋고 당연한 일로 여기기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작용이 존재한다. 디지털의 어두운 그늘 역시 현대인의 생활을 또 다른 측면에서 지배하고 있다.
◆디지털 스트레스
초창기 휴대폰은 말 그대로 들고 다니는 전화기에 불과했다. 전화를 걸고 받는 것 외에 다른 기능이 없었다. 하지만 기술 집적화로 휴대폰이 만능기기로 탈바꿈하고 있다. 휴대폰만 있으면 게임'TV 시청'인터넷 검색뿐 아니라 MP3로 음악을 듣고 카메라로 사진까지 찍을 수 있다. 기능이 복잡해질수록 매뉴얼 북은 두꺼워진다.
디지털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운 기계치 또는 중'장년층에게는 기능을 익히는 일 자체가 스트레스다. 특히 기존 휴대전화와 사용법이 전혀 다른 스마트폰이 출시되면서 스트레스는 극에 달하고 있다. '스마트폰 포비아(공포증)'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
스마트폰 사용자들이 자주 방문하는 인터넷 카페에는 "벨소리 바꾸는 데 이틀 걸렸어요" "사용설명서를 봐도 모르겠어요"라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디지털기기에 익숙하거나 얼리어답터 성향이 강한 이들이 아니면 사용법을 숙지하는 데 족히 몇 주는 걸린다.
한달 전 할인행사를 통해 아이폰을 구입한 회사원 이장훈(35)씨는 "문자를 보내는 간단한 기능을 익히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 틈만 나면 아이폰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아직도 기능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고 했다. 이씨의 회사 선배 김세영(45)씨는 옴니아1을 1년 전에 구입했지만 기능의 3분의 1 정도만 사용할 뿐 더 이상의 기능은 사용을 포기한 상태다.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수많은 기능이 아예 그림의 떡인 경우도 있다. 최근 옴니아2를 구입한 임윤성(43'자영업)씨는 "구형 휴대전화를 바꾸면서 트렌드에 맞게 스마트폰을 구입했는데 막상 사고 보니 기능이 너무 복잡해 전화기로 사용하기도 불편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부가기능을 빼 사용 스트레스를 없앤 휴대폰이 다시 각광받고 있다. 중'장년층에게 인기가 많아 일명 '효도폰'으로 불리는 제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 지난달 인터넷 경매사이트 옥션의 '효도폰' 등록건수는 1월에 비해 30% 정도 늘었다.
◆디지털 의존증
디지털기기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스트레스와 달리 젊은층들이 지나치게 디지털기기에 매달리는 현상이다. IT 제품에 지나칠 만큼 관심이 많은 대학생 이모(25)씨는 외출할 때 MP3, 스마트폰, 노트북 PC를 꼭 챙긴다. 갖고 가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늘 휴대폰을 곁에 두고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 받는 직장인 김모(23'여)씨는 휴대폰을 집에 두고 온 날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케이스. 그녀는 출근 도중 휴대폰을 가져오지 않은 사실을 알고 집으로 발길을 돌린 경우도 여러 차례 있다고 했다.
지난달 잡코리아가 남녀 직장인 85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41.2%인 353명이 최신 기기에 지나치게 동화되는 '테크노 의존형'이라고 답했다. 유형별로는 '휴대폰, PMP, 컴퓨터 등 기기를 지참하지 않으면 심리적으로 불안하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기기 사용에 너무 의존하게 됨' '새로운 기기 및 기술이 출시되면 밤을 새워서라도 관련 정보를 찾아봄' '새로운 기기 및 기술 사용법을 빨리 익혀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낌' '하루 종일 기기를 사용하고 나면 어지러움, 수면 장애와 같은 신체적 증후군을 겪음' 등의 순이었다.
디지털 의존증은 성인들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2008년 초등전문 학습사이트 에듀모아가 전국 초등학생 7천612명을 대상으로 디지털기기에 대한 의존도를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34.2%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주 사용하는 디지털기기를 일정 기간 사용하지 못하면 불안하고 불편함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극심한 불안감과 불편함을 느낀다'는 응답자도 11.5%에 달했다. 또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디지털기기를 갖지 못하면 소외되는 기분을 느낀다'는 응답도 28.6%를 차지했다.
◆디지털 치매
디지털기기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기억력과 계산능력 등이 크게 떨어진 상태를 말한다. 디지털 치매는 디지털 의존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치매 가능성도 커진다.
"휴대폰 단축키를 늘 사용하다 보니 집 전화번호도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다. 간단한 암산도 잘 되지 않아 휴대폰에 내장된 계산기로 한다. 점점 바보가 돼 가는 느낌이다." 회사원 박성준(42)씨의 하소연이다.
길눈 밝기로 친구들 사이에 소문 났던 이상우(39)씨는 1년 전 내비게이션을 구입한 뒤 길치가 된 경우다. 5년 전 지도를 보며 찾아간 해남길은 기억이 나지만 불과 2주 전 내비게이션에 의존해 다녀온 춘천길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 그는 "내비게이션 없이는 춘천에 있는 친척집을 다시 찾아갈 수 없을 것 같다. 내비게이션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다 보니 머릿속에 지나간 길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디지털 만능주의가 초래한 디지털 치매는 현대인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지난해 한 취업 포털 사이트가 설문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10명 중 6명이 디지털 치매 현상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응답자들은 '외우는 전화번호가 거의 없을 때' '단순한 암산도 계산기로 할 때' '손글씨보다 키보드가 더 편할 때' '가사를 끝까지 아는 노래가 별로 없을 때' 디지털 치매라는 생각이 든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치매가 의심되면 가급적 디지털기기를 멀리하고 머리를 굴려 잠자는 두뇌를 일깨우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의 전화번호나 좋아하는 노래 몇 곡 정도는 외운다 △생각하면서 글을 읽는 것이 기억력과 사고력 향상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신문이나 잡지를 매일 한두 시간 꼼꼼히 읽는다 △필기구를 들고 다니며 메모하는 습관을 기른다 △일기를 쓴다 등의 방법을 권한다.
김희철 계명대 동산의료원 정신과 교수는 "디지털 치매는 뇌기능 이상이 아니라 디지털기기에 너무 의존해 생기는 상대적인 집중력 결핍 증상"이라며 "중요한 일은 메모하거나 암기하는 훈련을 통해 집중력과 관심도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디지털 그림자·e폐기물
디지털 시대가 남긴 그늘에는 사람들이 겪는 다양한 증후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 그림자는 CCTV에 찍힌 영상처럼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생성되는 디지털 정보를 말한다. e폐기물은 폐기되는 휴대폰, 컴퓨터 등 디지털기기를 지칭하는 용어다.
시장조사기관 IDC는 '2011년 세계 디지털 정보성장 전망 보고서'를 통해 매일 생성되는 디지털 그림자가 이메일, 사진, 동영상 등 개인이 만들어내는 디지털 정보량을 초과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 전 세계에서 매년 10억대 이상의 디지털기기가 폐기 처분되고 있으며, 2011년 전후로 각국에서 아날로그 방송을 종료하고 디지털 방송으로 전환하면 폐기되는 아날로그TV, DVD 플레이어 수량이 지금보다 2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안상호 편집위원 shahn@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