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를 즐겨보지는 않지만, 필요할 때면 가끔씩 찾아본다. 악몽을 자청하여 미리 꾸어보는 셈이다. 머리가 무겁도록 뒤숭숭하거나, 문득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라도 막혀올 때면 제법 효험을 보고는 한다. 그 대상이 오싹하고 섬뜩한 귀신이나 괴물이든, 혹은 흉측한 살인마이든 상관없다. 둘러싸여 옴짝달싹 못하고 나서야 비로소 온갖 사소한 일상들의 소중함에 눈이 새롭게 뜨인다. 비운의 주인공들이 핏발선 눈동자와 피범벅이 된 손을 절망적으로 허우적거리며, 그토록 간절하게 찾아 헤매던 모든 것들의 이름으로 말이다. 여느 햇살이 그리도 눈부시고, 무심코 들이마시는 공기가 이토록 달콤하다니. 발밑을 떡 하니 받쳐주는 땅바닥이 몸서리치도록 고맙기만 하다. 가슴을 조여오고 어깨를 짓누르던 근심과 걱정들의 많은 부분이 실상은 알량한 이기심이나 욕심이 빚어낸 치기어린 투정이었음을 새삼 깨닫고는 한다.
'1408'(미국, 2007)은 흔히 호러 킹으로 불리는 스티븐 킹의 동명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전형적인 공포 스릴러이다. "1408호는 '샤이닝'의 오버룩 호텔이나 '싸이코'의 베이츠 모텔만큼 무섭지는 않지만, 투숙해 볼 가치가 있는 영화"라는 평만큼이나 억지스러운 군더더기 없이 제법 여운을 남긴다. 초현실적인 공포 소설을 쓰는 작가지만,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 다분히 냉소적인 회의론자인 주인공이 저주받은 방에서 겪는 하룻밤의 악몽을 보여준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이어지는 경악스러운 광경들 속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아예 그 경계선마저 무너진 뒤에 남겨진 황량한 곤혹스러움들. 지금 딛고 있는 이 땅이 마음이 빚어낸 허방다리인지, 몸으로 직접 부대끼고 있는 현실인지조차 혼란스러울 뿐이다.
"그대가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9세기의 유명한 선승인 임제 선사는 "기적이란 물 위를 걷는 게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것"이라고 말했다. 악몽에서 가까스로 깨어난 아침이라면 더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 틱낫한 스님의 속삭임이다. "모든 사람들이 땅 위를 걷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자유롭지 않게 노예처럼 걷는다. 그들은 미래나 과거에 붙잡혀서 자신들의 삶이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살 수가 없다." 마치 영화 속의 인물들에게 던지는 게송인 양 이어지는 말씀이다. 지난날의 회한이나 다가올 불안에 사로잡혀서 지금, 이 순간의 축복과 기적을 잊고서 헤매는 것이 비단 영화 속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삶의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며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법정 큰스님이 입적을 하시면서 남겨주신 고마운 선물이다.
송광익(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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