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의 동양학] 스승의 수행정신 철저하게 본받아

입력 2010-03-20 07:19:00

●석두와 효봉스님의 法을 이은 '무소유'의 실천적 인물 법정 스님

한국 불교의 선맥은 석가→마하 가섭(1대)→보리 달마(28대·동토 초조)→33대(동토 6祖) 혜능→38대 임제→57대 태고 보우→63대 청허 휴정으로 이어진다. 조선 불교의 중흥조인 서산대사 청허 휴정(淸虛 休靜·1520~1604)의 법맥은 사명, 편양, 소요, 정관 등으로 이어졌다. 이 가운데 편양을 제외한 나머지 문파는 대부분 대가 끊겼고, 편양 언기(鞭羊 彦機·1581~1644)의 문손만 크게 번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편양의 법은 풍담→월담→환성 등으로 이어졌고, 환성 지안(喚醒 志安·1664~1729) 이후 10대가 지나서 77대 석두 보택(石頭 寶澤·1882~1954)이 법을 이어 금강산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법정 스님의 스승인 효봉 스님은 10년 간 법관으로 일하다가 1923년 처음으로 사형 선고를 한 후 "내가 갈 길은 따로 있다"며 사표를 던지고 3년 간 엿판 하나 메고 팔도강산을 방랑하는 고행(苦行)에 나섰다. 1925년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의 석두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판사라는 '화려한 직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출가한 인물이 '절구통 수좌'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효봉 학눌(曉峰 學訥·1888~1966)이다. 효봉은 보조국사 지눌(知訥·1158~1210)이 정혜결사운동을 벌였던 순천 조계산 송광사에 머물면서 보조 지눌이 주창한 정혜쌍수(定慧雙修)의 가풍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10년 동안 절을 중창하고 수많은 후학들을 가르쳤다. 1946년 해인사에 수행도량인 가야총림이 개설되자 초대방장으로 추대되어 인재양성에 진력했다. 그 후 통영 도솔암과 미래사에 머물다 1954년 동산(東山·1890~1965), 청담(靑潭·1902~1971), 금오(金烏·1896~1968) 등과 함께 불교정화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효봉의 생활은 검박했다. 흘러내린 촛농을 모아 심지를 박아 다시 불을 밝혔으며 "걸레도 너무 심하게 짜면 빨리 떨어진다"며 살살 짜라고 했을 정도였다.

'무소유'의 지혜를 일러주고 맑고 향기로운 삶을 몸소 실천한 법정은 대학 재학 중에 삶의 의문을 풀고자 출가하여 1956년 7월 15일 송광사에서 당대의 큰 스승이었던 효봉 선사를 은사로 사미계를 수계하여 2010년 3월 11일 입적하기까지 '무소유' 등 수십 권의 저서와 법문을 통해 스승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해 보이며 우리들에게 크나큰 깨침과 울림을 전했다. 법정은 스승인 효봉의 철저한 수행정신을 본받아 '무소유'의 실천행을 몸소 보여주었다. 효봉은 시간관념이 철저했는데, 법정이 찬거리를 사러 나갔다가 밥 지을 시간을 10분 넘겨 돌아오자 "오늘은 공양을 짓지 말고 단식이다. 수행자가 그렇게 시간관념이 없어 되겠느냐" 며 준엄하게 꾸짖고는 단식했다. 우물가에 밥알 하나만 흘려도 크게 나무라는 등 시주물에 대해서도 엄격했으며 생활이 지극히 검박했다. 효봉은 "수행자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 곧 부자 살림"이라고 항상 말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서 법정은 철저하게 '무소유'와 '무보시'의 불교의 가르침을 간결하면서도 쉬운 탁월한 필력으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실천에 옮겼다. 그는 종교를 초월해 많은 국민들에게 진정한 삶의 길을 제시, 불교계를 뛰어넘어 국민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종교인으로 추앙받았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을 번역한 법정 스님은 서산의 삼교회통(三敎會通)의 정신을 이어받아 종교 간 벽을 허무는 데도 앞장섰다. 천주교, 원불교와의 교류로 길상사 개원법회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축사를 한 데 이어 법정스님은 1998년 명동성당 축성 100돌 기념 초청 강연을 했다. 우리는 작년과 올해 한국사회를 밝고 아름답게 비춰주었던 두 어르신을 모두 현세에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경험했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이 우리에게 남겼던 맑고 향기로운 정신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잡을 것이다.

혜명동양학연구원장(다음카페-혜명동양학연구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