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런 기억과 함께 디카프리오가 걸어온다
도대체 우리의 기억은 믿을 수 있는가.
기억이란 경험한 것이 어떤 형태로 간직되었다가 나중에 재생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재생될 때는 원본 그대로가 아니다. 일부분이 삭제되거나 훼손되기도 한다. 너무나 고통스러우면 아예 기억을 통째 지워버리기도 한다.
기억과 상처에 대한 섬뜩한 투쟁기 한 편이 개봉됐다.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셔터 아일랜드'이다.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 '살인자들의 섬'이 원작으로 루헤인의 또 다른 소설 '미스틱 리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의해 영화화된 적이 있다.
'셔터 아일랜드'는 기억이란 물에 젖은 몸을 힘겹게 추스르는 한 남자의 처절하면서 비통한 사연을 담고 있는 심리 스릴러다.
때는 전쟁의 광기가 잔존하고 있던 1954년이다. 보스턴 부근의 외딴 섬 셔터 아일랜드에 위치한 중죄인 정신병원에서 환자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연방보안관 테디 다니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수사를 위해 동료 척(마크 러팔로)과 함께 셔터 아일랜드로 향한다.
섬 한쪽이 깎아 지른 절벽으로 이뤄진 천연요새인 셔터 아일랜드는 중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를 격리, 수용하는 병동 겸 감옥으로 탈출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식 셋을 죽인 혐의를 받고 있는 여인이 이상한 쪽지만을 남긴 채 감쪽같이 사라지고, 테디는 수사를 위해 의사, 간호사, 병원 관계자 등을 심문하지만 모두 입이라도 맞춘 듯 꾸며낸 듯한 말들만 하고, 수사는 전혀 진척되지 않는다.
설상가상 폭풍이 불어 닥쳐 테디와 척은 섬에 고립되게 되고, 그들에게 점점 괴이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거장 마틴 스콜세지는 '분노의 주먹' '갱 오브 뉴욕' '디파티드' 등 주체 못할 남성적 힘이 철철 흐르는 영화를 주로 만들어왔다. '셔터 아일랜드' 또한 고전적 필름 누아르에 호러와 스릴러, 멜로적인 요소까지 가미해 만듦새가 높은 솜씨를 보여준다.
1950년대라면 전쟁의 상처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너무 많은 주검들을 목도한 탓에 산 자에 대한 존엄성도 상실된 때다. 정신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뇌의 전두엽을 제거하는 비인간적인 요법이 신기술로 각광받았으니 가히 인간성이 실종된 시대라 할 만하다.
셔터 아일랜드라는 공간도 그렇다. 도끼로 남편을 죽이고, 자식들을 물에 빠트려 죽이고, 사람을 불태워 죽인 끔찍한 정신병 중죄인들을 가두어 둔 섬이다. 폭풍우로 통신도 두절되고, 탈출할 수도 없는 절체절명의 고도(孤島)다.
스산하고 싸늘한 공기가 코끝에 스며들고, 시종일관 비바람으로 스크린이 흠뻑 젖는 듯하다. 불신과 의혹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최고조로 상승시켜, 차츰 어두운 과거들이 퍼즐처럼 짜 맞춰진다. 이제 도망갈 수 없는 진실과 만나게 된다. 과연 어느 것이 나의 진짜 기억일까.
영리한 관객이라면 "머리가 깨어질 듯 하다"는 테디의 고통을 보면서 사건의 전말을 예견할 수 있다. '충격적 반전'이란 홍보 문구를 떠올리면 반전의 정체도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충분히 예견했음에도 결말은 훌륭하다. 감독의 섬세한 연출 덕분이다.
불에 타 죽은 아내 돌로레스(미쉘 윌리엄스)의 환상과 언뜻 언뜻 떠오르는 공포의 기억들을 연민이 넘치게 풀어낸 탓에 슬픈 감상마저 들게 한다.
감독의 연출력에 촬영과 편집기술, 음악 등이 한데 어우러져 묵직한 충실도를 보여준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다. 꽃미남으로 치부되는 바람에 그의 연기력을 간과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어릴 적 찍었던 '길버트 그레이프'(1993년)를 비롯해 '토탈 이클립스'(1995년) 등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셔터 아일랜드'는 물이 올라도 한참 오른 그의 연기력의 진수를 볼 수 있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기억의 함정 속에 허우적대는 슬픈 한 인간의 모습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외 '간디'의 벤 킹슬리, '정복자 펠레'의 막스 폰 시도우, '브로크백 마운틴'의 미셀 윌리엄스 등 조연들의 연기도 일품이다.
'셔터 아일랜드'는 지하실의 차가운 공기처럼 날카롭게 파고드는 어두운 심리 묘사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러닝타임이 다소 길다는 느낌을 제외하고는 밀도 있는 이야기 전개에 노련한 연출 솜씨, 배우들의 돋보이는 연기 등 촉수적이며 즉흥적인 일반 스릴러와 격을 달리 한다. 이참에 원작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겠다. 15세 관람가. 러닝타임 138분.
김중기 객원기자filmtong@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이철우 "안보·입법·행정 모두 경험한 유일 후보…감동 서사로 기적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