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에 선배로부터 들은 우스개다. 대구에 사는 한 50대 남편이 달력을 보다 부인이 빨간 색연필로 또박또박 쓴 '대월동화'(大月東火)란 사자성어를 보게 됐다. "큰 달과 동쪽의 불이라." 아무리 해석을 하려 해도 그 뜻을 알 수 없자 남편이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이 남편에게 알려준 해석이 '걸작'이었다. "대백(대구백화점)은 월요일 놀고, 동백(동아백화점)은 화요일 논다는 뜻인데…. 지금껏 그것도 몰랐어요?"
'동화'(東火)로 일컬어지던 동아백화점이 이랜드그룹 계열사인 이랜드리테일에 매각됐다. 팔렸다는 뉴스는 한 줄에 불과하지만 그에 따른 파장은 만만치 않다. 대구경북 사람 가운데 동아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로 '동백'은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동백은 물건을 사는 백화점을 넘어 대구경북을 상징하는 브랜드의 하나였다. 대구 중구 반월당 동아쇼핑 안에 있는 공연장에서 연극이나 콘서트를 본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동아쇼핑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생방송을 진행하는 지역 방송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엽서를 보낸 사람들도 적지 않다. 동아라는 이름은 대구경북에서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추억이자 문화의 한 표상인 것이다.
동아백화점 매각은 지역 유통기업의 퇴장이란 단순한 사건을 넘어 대구경북 경제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본보기이기도 하다. 동아백화점 사주인 이인중 화성산업 회장은 "경쟁력 강화와 신성장 동력 확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했다. 유통과 건설이 다 부실해지는 상황에서 유통 분야인 동아백화점을 팔 수밖에 없다는 심경을 토로한 것이다. 롯데백화점이 진출해 지역 백화점의 영토를 갈수록 잠식하는 가운데 현대백화점이 바로 옆에서 문을 열고, 또 다른 공룡인 신세계마저 대구 진출을 모색함에 따라 동아백화점으로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으리란 짐작을 할 수 있다.
화성산업은 유통업에서 퇴장하지만 '동아'라는 브랜드만은 명맥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이랜드와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사원들의 고용과 협력업체 관계도 유지될 것이란 관측도 있다. 하지만 외지기업이 주인이 된 만큼 동아라는 백화점을 대하는 대구경북 사람들의 마음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아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이랜드가 주인이 된 동아백화점이 대구경북을 대하는 마음도 변할 수밖에 없다. 직원들의 고용 유지와 협력업체와의 관계 유지 약속도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될 것이란 점은 기업 매각'인수 역사에서 누누이 봐온 사실이다. 대구경북으로서는 이 모두를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구상공회의소 회장이 수장으로 있는 기업은 우여곡절을 겪는 경우가 많다는 '징크스'도 다시 입증됐다. 호사가들의 말일지도 모르지만 대구상의 회장들이 경영하는 기업들엔 이래저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대구 경제가 바닥을 헤매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전국적으로 토종 백화점이 마지막으로 명맥을 유지한 곳이 대구였다. 대구보다 경제력이 낫다는 부산을 비롯해 전국 대도시에서 토종 백화점들은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그나마 대구에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토종 백화점들이 힘을 쓴 것은 대구경북 사람들의 애정 덕분이었다. 그러나 세태가 달라졌다. 명품 라인을 골고루 갖춘 서울에 본사를 둔 백화점들을 찾는 고객들이 늘어나고 심지어 서울이나 부산으로 원정 쇼핑을 가는 고객들도 많아졌다. 더 이상 지역기업으로서의 인센티브가 없어졌다.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이순목 전 우방 회장은 소유권은 외지기업에 넘어가더라도 경영권만은 자신이 계속 갖고 있었다면 우방이 지금과 같은 어려운 처지에 다시금 봉착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이 전 회장의 개인적 소회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동아백화점이 외지기업에 넘어가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 말이 새삼스레 머리에 떠오른다. 건설'유통 양대 산업이 대구를 이끌던 시절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던가. 봄은 왔지만 대구경북 경제는 아직도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겨울이다. 동아백화점의 매각 소식을 지역 경제의 몰락으로 여기며 안타까워하고 씁쓸해하는 게 지역민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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