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에 뇌동맥류 수술을 받은 할머니가 외래에 오셨다. 치질 수술을 받으려고 하는데 수술에 지장을 주는 약이 투약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해서 오셨다고 했다. 개인병원으로 환자를 전원할 때 적어준 처방전을 확인하니 그런 약은 없었다. 괜찮겠다는 대답을 해드리고 할머니의 나이를 확인하니 69세다.
오랜만이었다. 반갑기도 해서 할머니에게 손자 손녀 보며 사는 재미가 어떠냐고 물었다. "재미는 무슨 재미. 후회스러워. 내가 28세에 남편과 사별했어. 그때부터 시장에서 순대 장사하면서 남매를 키웠지. 이제는 둘 다 결혼해서 각각 살지만 그것들이 잘 살지를 못해. 돈이 없어 공부를 많이 시키지 못했거든. 그것이 가끔 명치 끝을 꽉 막기도 해. 잘못된 삶이야. 내 삶이.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애들을 버리고 내 삶을 찾아갔어야 했어. 무얼 바라고 이렇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어. 지금이라도 내 청춘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돌이키는 것, 안 되겠지?"
부끄러운 듯 빙그레 웃는 할머니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복숭아꽃을 닮은 분홍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잊고 살아야 했던 청춘의 분홍빛, 70세 가까이 된 그녀지만 아직도 그 빛을 완전히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다. 이팔청춘 긴긴 밤을 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찬바람을 온몸으로 막으면서 어린것들 부둥켜안고 혼자 울면서 지냈던 그 시간들이 서러워서. 순댓국밥을 일부러 사 먹으면서 은근슬쩍 손을 잡아주던 그 믿음직한 젊은 홀아비를 따라나서지 않은 것이 눈물겨워서.
"할머니, 지금이라도 한 번 영감님을 찾아 보세요. 복사꽃 같은 화려한 분홍색은 아니더라도 백목련 같은 은은한 향기를 전해 주시는 영감님은 어쩌면 찾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중얼거리면서 인사를 하자 아직도 부끄러운 듯 할머니가 황급히 나가신다. 등을 진료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고 진료실 벽에 붙어있는 거울을 쳐다보니 영감이 마주보고 있다.
"청춘을 돌려다오!" 내가 중얼거리니 거울 속 영감의 입도 내 입과 똑같이 움직인다. "할머니한테도, 나에게도 한 번만 더 청춘을 돌려다오. 그러면…, 그러면…." 그러면 다음에 이어지는 수많은 한(恨) 되는 일들이 자꾸만 메워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임만빈 계명대 동산의료원 신경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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