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창석의 뉴스 갈라보기] 영남제일관은 슬프다

입력 2010-03-06 07:46:15

오늘날 도시는 과거와 현재가 병존하는 다층적인 공간이 되어야 함은 이미 상식이다. 부박한 도시 환경을 심화시키는 한편 시민들의 정신에도 깊이를 더해주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개문식'을 한 영남제일관을 주목하고자 한다. 영남제일관은 100년 전에 허물어진 대구읍성의 정문이다.

내가 옛 대구읍성을 생생히 느끼게 된 것은, 수년 전 젊은 소설가 김광원씨의 단편 '그 성'(미발표)을 보고서였다. 소설은 성곽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그려놓아, 대구읍성이 그토록 아름다웠던가 의아해했다. 물론 대구에 성곽이 존재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여느 도시의 성곽과 별다른 차이가 있겠나 넘겨본 게 사실이었다.

대구읍성은 무척 기품있고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조선 말기인 1888년에 대구를 다녀간 프랑스인 샤를 바라는 '조선기행'에서 대구읍성이 "중국의 북경성을 축소한 것과 똑같다"며 "북경에서처럼 그 성벽의 각 면에는 웅장한 성문이 서 있었다"고 술회한다. 읍성이 그토록 위용을 가졌던 이유는 대구에 조선시대에 경상도 전체를 다스리는 감영이 위치한 데다 왜란을 겪으면서 전략적인 요충지로 확인되었기 때문이었다.

대구읍성은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7년에 폐허가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 무렵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들어왔고 그들은 성 외곽인 대구역 부근의 땅을 사들였다. 당시 경상감사 서리는 땅값을 높이고 상권을 넓히려는 일본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성을 헐어버렸다. 실제로 성벽을 허물자 땅값이 10배나 폭등했다고 한다. 일본인 부동산 투기세력을 비호하려고 성을 허물던 같은 기간에 항일 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으니, 한 도시 안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공방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런데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현 시대에 와서이다. 대구시는 1980년에 대구의 상징물 건립의 일환으로 대구읍성의 정문인 영남제일관을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복원은 마쳤으나 제대로 고증하지 않았을 뿐더러 도심에서 훌쩍 떨어진 망우공원에다 위치시켰다. 상징물이라면서 왜 한쪽 구석에 두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서울의 숭례문은 도심 한가운데서 웅대한 자태를 내뿜고 있어서 오랫동안 서울시민의 자긍심을 크게 돋웠다. 2년 전 누각이 불 타 잿더미가 되었을 때 서울시민만 아니라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겼다. 그 숭례문이, 복원을 위해 무려 2년에 걸친 발굴 조사, 재료 확보, 장인 선정 등 준비작업을 완료하고 이제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서울에 숭례문이 있다면 대구에는 영남제일관이 있었다. 물론 규모와 소임에서는 분명 차이가 있으나, 조선시대에 경상도 전체를 지휘했던 대구읍성을 떠올리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니다. 복원을 위한 기초 작업만 2년이 걸린 숭례문을 보면서, 도시 한쪽 끄트머리에 함부로 지어버린 영남제일관을 생각하면 씁쓸하기 짝이 없다. 원래 위치에 두긴 어려웠다 해도 반월당이나 혹은 달구벌대로의 어느 한 지점에 놓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때가 1980년이니 아직 반월당이나 달구벌대로가 확장되기 전이라 한층 수월했을 게 아닌가. 망우공원에다 지은 것은 차라리 안 한 것보다 못하다. 현재의 것이 없었다면 이제라도 제대로 복원하자는 여론이 형성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불 탄 숭례문이 중창(重創)을 시작하는 시점에 우리는 또 한편의 희화적인 장면과 만나게 되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영남제일관을 시민에게 완전히 개방하기로 했단다. 시의 고위 공무원이 여럿 나와 보는 가운데, 조선시대 복장을 한 수문군(守門軍)이 경상감사에게 열쇠를 전달하고 이것을 다시 군관에게 전달하는 '개문의식'을 거창하게 가졌다고 한다. 도성 정문의 행사를 저런 외진 곳에서 하다니, 초라하다 못해 처참할 지경이다. 원래 있던 곳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범어네거리쯤에 이름에 걸맞게 웅대한 영남제일관을 복원해놓고 '개문의식'을 가졌다면 시민들은 자긍심을 느꼈으리라.

6'2지방선거를 앞두고 시장 출마자들이 여럿 입에 오르내리지만, 도시를 꾸려나가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소설가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