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꼬리속' 쉽게 봤더니…아뿔싸, 길 잃을 만큼 복잡한 산세
한 해가 바뀌었다. 텅 빈 시간의 지갑에 다시 365일이 채워졌다. 어영부영 시간을 보낸 뒤에 찾아오는 씁쓸함과 허탈감이 벅찬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그것도 잠시뿐. 54일이 흘렀고 남은 시간은 311일이 됐다. 해가 바뀌는데 대해 워낙 무덤덤했지만 올해는 달랐다. '동행-경북을 걷다'를 쓰며, 일 년 내내 부지런히 걸어다닐 생각을 하니 설렘만큼 부담도 컸다. 당초 첫 회는 포항 호미곶을 누벼볼 생각이었다. 호미곶은 호랑이해에 처음 떠오르는 태양을 맞는 곳. 왠지 이 곳을 처음 가야할 것 같았다. 괜스레 의미 부여가 될 것 같았지만 미처 길이 준비되지 않아(사실 길은 원래 있었고 마음의 준비가 늦었을 뿐이다) 미루고 말았다. 뒤늦게 찾아온데 대한 서운함 때문이었을까. 앞서 며칠간 포근하더니만 갑작스레 한파가 찾아왔고, 예상치 못한 어려움도 만났다. 오늘 답사할 곳은 호미곶을 관통하는 '장기목장성 길'. 호미곶의 옛 이름은 장기곶이었다. 옛날 장기현 자리에 있던 말 목장의 돌담 길을 따라 걸었다. 상상 이상의 즐거움을 만났다.
##조바심 낸 게 화근…휴대전화까지 불통
길을 잃고 말았다. 낭패다. '동행' 시리즈를 시작한 뒤 폭설로 길이 없어지거나 길라잡이가 피치못할 사정으로 함께 가지 못한 적은 있어도 길을 잃기는 처음이다. 실패한 답사까지 포함하면 열번 넘게 산길과 들길을 누볐다. 실패라고 해도 길을 찾았다가 상황이 여의치 못해 돌아선 경우다. 호랑이 꼬리에서 길을 잃다니. 그 넓은 등줄기도 아니고. 대구에서 이른 걸음으로 나섰다고 해도 호미곶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 도중에 길 안내를 맡기로 했던 포항시 김진규 학예연구사가 "회의 때문에 동행은 어렵겠다"고 알려왔다. 출발 이틀 전 통화를 했던 지역 향토사학자도 일정상 동행이 힘들다고 했다. 일찌감치 일정을 조정했어야 했다. 호미곶을 너무 얕잡아 봤다.
출발지인 포항시 남구 동해면 흥환리까지 찾아가는 중에도 두어 차례 길을 헤맸다. 이정표를 따라 호미곶 해맞이공원으로 가면 도중에 만날 것을 괜스레 잔머리를 굴려서 지름길을 구하려다 시간만 허비했다. 가까스로 흥환 보건진료소 앞에서 김진규 학예연구사를 만났다. 포항에서 호미곶으로 가다가 흥환리 작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바로 오른쪽으로 꺾으면 오늘 답사하려는 '장기목장성 길'로 접어드는 출발점이다. 바다로 흘러드는 개울물 건너편에 동해초교 흥환분교 자리도 있다. 가뜩이나 매운 겨울 찬바람 속에 시간마저 늦어져 마음이 급했다. 지도를 꺼내놓고 길을 설명할 때 차근차근 들어야 했다. 혼자 조바심이 나서 무작정 지도를 빼앗듯이 건네받고는 산길로 접어든 것이 화근이었다. 하도 급하게 듣다보니 나중에 한참 길을 헤맬 때에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서로 헛갈려서 동행한 윤종대 작가와 말다툼까지 벌어질 뻔 했다. 행여 독자들까지 헛갈릴 수 있으니 우선 길안내부터 제대로 해놓고 나머지 푸념을 늘어놓자. 앞서 작은 다리를 건넌 뒤 바로 우회전해서 정확히 100m를 가면 흥환리 경로당이 나오고, 거기서 25m를 가면 왼쪽으로 꺾는 오솔길이 나온다. 거기서부터 걸어가면 바로 '장기목장성 길'이다. 처음부터 걷기가 부담스러우면 경로당에서 140m를 간 뒤 왼쪽으로 포장도로가 나온다. 그 곳으로 가야한다. 속된 말로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고 했는데 기자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한번만 차근차근 설명을 들으면 될 것을 무엇이 그리 급하다고 길을 서둘렀는지 지금도 후회스럽다. 길을 제대로 찾았다면 조금만 가도 목장성 돌담이 왼쪽에 보인다.
지금은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지만 그때는 심각했다. 산 속에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곳에서 이정표 하나 없이 멀뚱하게 서 있는 기분이라니. 그것도 찬바람 쌩쌩 부는 겨울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데. 몇 차례나 길을 벗어나 산 속을 헤매다가 "이 쪽도 아닌가벼"하며 되돌아 나오곤 했다. 아무튼 잘못 들어선 길의 정취도 쏠쏠한 재미였으니 투덜거릴 것은 없다. 기자와 동행한 윤종대 작가는 앞서 경로당에서 용감히(?) 직진하고 말았다. 가도 가도 호젓한 오솔길은 나오지 않고 깔끔하게 정비된 임도가 굽이치며 펼쳐졌다. 그때만 해도 길을 잘못 택했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거의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길을 헤매며 반대편 아스팔트 길을 만난 뒤에야 '아뿔싸'하며 이마를 쳤다. 지금 다시 돌아가는 것도 아득했다. 결국 앞서 정상 부근 갈림길에서 '호미곶 13.4km'라는 이정표를 만나 다시 임도를 따라갔다. 가야할 목적지는 구룡포읍 구룡포3리. 하지만 방향도 모른 채 무작정 산길을 내려설 수는 없으니 길을 따를 수밖에.
##임도 옆엔 1천400년 이어 온 軍馬 목장 터
호미곶, 그 작은 호랑이 꼬리 속에 이처럼 복잡한 산세가 들어앉았을 줄이야. 감탄만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자칫하다가 '장기목장성'은커녕 돌아가는 길 찾다가 해가 저물 판이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 찾아오면 될 것을. 마음을 바꾸고 나니 한결 편해졌다. 비록 목적지는 아닐지라도 산길을 즐기기로 했다. 평탄하게 잘 닦인 임도는 산책삼아 걷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얼마나 갔을까. 한 굽이 돌아 저 멀리 바다가 보이고, 다시 한 굽이를 돌면 야트막한 봉우리가 맞아선다. 그리고 바로 그 곳에 '장기목장성' 옛 길이 남아있었다. 우리가 따라간 임도는 원래 걸어야 할 장기목장성 길과 정확히 90도로 교차했다. 목장성 길이 호미곶을 가로지른다면, 임도는 호미곶을 따라 길게 늘어선 형국이다. 그러니 중간에서 만날 밖에. 반가움에 소리라도 지를 판이다. 옛 자료에는 흔적만 아스라이 남아있던 그 길은 지금은 제법 정비가 된 덕분에 돌담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돌담을 따라 내려가면 목적지인 구룡포가 나온다.
답사 이튿날 김진규 학예연구사는 '장기목장성'에 얽힌 자료를 보내주며, 동행하지 못한 미안함과 함께 '길을 잃지는 않았는지' 안부를 물어왔다. 밑도 끝도 없이 서두르는 모양새를 보고 적잖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자료에 따르면, 장기목장성은 일명 '석병성(石屛城)이라고도 하는데, 구룡포읍 창주리 돌문에서 시축한 성벽은 눌태리 계곡을 거쳐 응암산을 서쪽으로 돌아 공개산 서북편 산정을 지나 동해면 흥환리에 이르는 지대에 축성하여 그 동편 전역을 목장으로 사용하는 길이 25리, 높이 10척에 달하는 장성'이라고 돼 있다. 호미곶을 가로질러 쌓은 석성의 동쪽, 그러니까 바다쪽으로 전부가 말을 키우는 목장이었던 셈이다. 말이 높이 3m에 달하는 돌담을 뛰어넘거나 바다로 뛰어들지 않는 한 전혀 빠져나갈 수 없는 천연요새와 같은 목장인 것.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장기목장성이 언제 축조됐는 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조선 세종실록에 목장 감독관을 장기수령이 겸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걸로 봐서 이미 세종 이전에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삼국유사에 따르면, 호미곶에 있는 대보면 장사리 명월암이 신라 선덕여왕 때 지역 군마사육을 기원하는 사찰로 지어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것이 장기목장성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간접적으로 추론해 보면 목장의 역사는 1천400여년을 헤아리게 된다.
##1905년 남았던 말 300마리 일제에 징용
기록에는 호랑이의 피해가 심해 이를 막기 위한 산행장(山行將)과 포수, 창군까지 배치됐다고 한다. 한때 호랑이 꼬리를 누비던 호랑이라. 하지만 정작 기자의 눈길을 끈 대목은 따로 있었다. 조선시대 지방에서 말 보살피기는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말을 보살피는 사람을 '목자'라고 불렀는데 책임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한 사람당 30필 가까운 말을 보살펴야 하고, 일 년간 새끼 말 20필 이상을 생산해야 했다. 행여 게으름이나 실수, 속임수가 있었다면 심한 매로 다스렸고, 사고로 말을 잃으면 면포로 배상해야 했다. 목자는 종신직이며 자손에게 대물림되고, 다른 업을 가질 수도 없었다. 드라마 '추노'에 나오듯이 군마를 보살피는 노비의 비참한 삶이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이들은 목장 안에 살면서 1천여필 말의 분뇨를 치우거나 말먹이를 공급했고, 각종 부역에도 동원돼야 했다. 모르기는 해도 당시 목자의 생활은 말(馬)보다 못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앞서 흥환리 바닷가에는 작은 비석들이 서 있다. 1882년에 세워진 비석은 '감목과 민치억 영세불망비'와 흥인군 '이최응 영세불망비'. 내용은 '장기목장성에 속한 7마을(七防)이 있었는데 모리배들이 세금을 많이 걷어들여 1천여 백성이 살아가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흥인 대감께서 특별히 백성들의 뜻을 살피시어 조그마한 잘못도 밝히고 많이 거둬들이는 고질적 폐단을 없애며, 그 근원을 뿌리 뽑아버리니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모이게 되었고, 목장 전체가 편안하게 돼었다'는 것. 공덕비만 봐도 당시 백성과 목자들의 고역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장기목장은 1894년 갑오경장 후 일시 없어졌다가 다시 부활했지만 1905년 을사늑약 후 일제의 압력으로 결국 폐지됐고, 당시 남아있던 말 300여 마리는 징용당했다고 전해진다.
##해맞이 명소 이면엔 민초들의 쓰라린 애환
목장성이 남아있는 곳 인근 정상부에는 '구룡포봉수대'(발산봉수대) 자리가 남아있다. 흔적만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고 전망대와 널따란 공원도 만들었다. 이곳에 올라서면 호미곶 일대가 눈앞에 펼쳐진다. 저 멀리 동해가 마치 산봉우리를 넘어설 듯 일렁이고, 영일만 건너 포항시도 아스라이 눈에 잡힌다. 차가운 겨울바다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줄기를 훔쳐간다. 이곳 산줄기를 내달렸을 말들의 모습 속에 고된 부역을 견디며 묵묵히 땀과 피를 흘렸을 민초들의 검게 탄 얼굴이 겹친다. 돌무더기처럼 남아있는 목장성 길을 따라 산을 내려선다. 구룡포읍 돌문은 예전 목장성 입구를 지키던 보초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아직도 그 지명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저 해맞이 명소로만 알았던 호미곶. 해변 도로를 따라 한바퀴 돌아보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 골골마다 저리도 많은 역사와 민초의 아픔이 남아있을 줄이야. 한때 호랑이가 어슬렁거렸다는 호미곶을 뒤로 한 채 포항쪽으로 향한다. 남아있던 말들마저 일제에 끌려갔다니.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포항시 학예연구사 김진규 054)270-2274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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